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495
한자 城隍堂
영어공식명칭 Seonghwangdang Shrine
이칭/별칭 서낭당
분야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강중휘

[정의]

경상북도 영주 지역에서 마을의 수호신을 모셔두는 제당.

[개설]

영주 지역에서는 마을에서 동제를 지내는 제당으로 수목과 비슷한 정도로 성황당[당집]을 이용한다. 성황당 내에는 대개 종이나 나무에 ‘성황신위’ 또는 ‘성황지신’이라고 쓰여 있는 신위가 많으며, 산신 또는 여자, 남자가 그려져 있는 화상이 있는 경우도 보인다. 특히 영주 북부 지역은 역사적으로 단종의 유배지인 영월과 가깝고, 순흥이 금성대군의 유배지였기 때문에 단종복위운동과 관련된 단종금성대군을 성황신으로 다수 모시고 있다.

[내용]

영주시 순흥면 읍내리의 성황당은 비봉산 기슭 본당인 읍치 성황사와 영주시 단산면 두레골에 있는 성황당의 상당에서 지내는 제사로 나뉘는 것이 특징이다. 본당인 비봉산 성황사는 산 서남쪽 순흥안씨 세배단소를 조금 지난 우측 산골짜기 안에 남향하여 있다. 당집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납도리집으로 보기 드문 규모이다. 기단은 자연석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그 위에 네모기둥을 세웠다. 벽체는 판벽을 치고 전면 어칸에만 쌍여닫이 띳장 널문을 닫아 출입하게 했다. 내부는 통간에 합판을 깔고 신단은 뒷벽에 길게 만들어 놓았다. 신위는 왼쪽에서부터 삼신당신위(三神堂神位), 서배위신위(西配位神位), 순흥안관성황신위(順興按官城隍神位), 동배위신위(東配位神位)를 모셨다. 우협칸에는 ‘술할마시’라고 부르는 돌 신체가 있다. 상부 가구는 3량가이고, 지붕은 홑처마 맞배지붕에 골기와를 이었다.

상당인 두레골 성황당은 단산면 단곡리 단곡교 건너기 전 우측으로 약 4㎞가량 험한 산길로 올라간 곳에 있다. 개울 우측 편 평탄부에 상당과 산신당이 자리 잡고 있는데, 산신당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있었고, 상당은 금성대군을 위해 1906년(광무 10)에 건립되었다. 본당은 자연석을 높게 쌓은 축대 위에 동남향 한 단칸 납도리 3량가 맞배집이다. 산신당은 본당 앞쪽 높은 축대 위에 놓인 3량가 맞배집이다. 내부는 마루를 깔고 ‘산신지위’라는 위패가 모셔져 있다. 과거 금성대군이 피를 흘린 혈석을 죽동마을에서 이곳으로 옮겼다는 이야기가 있다.

순흥면 지동리 죽동마을의 성황당은 두레골 성황당의 부인인 ‘여성황’을 모신 당집으로 원래 금성대군의 혈석을 모시고 있었던 곳이다. 성황당의 형태는 한 평 남짓한 건물이고 지붕은 맞배지붕에 골기와를 이었다. 전면부에 문은 없고 출입구만이 나 있는 형태이다. 모시고 있는 신체로는 두레골로 혈석을 옮겨간 이후에는 한지를 우측 벽에 흰 무명실로 묶어 놓은 형태로 남아 있다.

단산면 사천리 새내마을의 성황당은 마을 앞에서 숨을 거두었다는 세 명의 여자 보살을 모시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건물은 단칸의 납도리 3량가 맞배지붕 집이다. 기단은 시멘트 마감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아 네모기둥을 세웠다. 전면만 판벽에 쌍여닫이 띳장 널문을 달았고, 내부 바닥은 시멘트 모르타르로 마감하였다. 신체인 세 개 돌은 뒷벽 당위에 안치되어 있고, 볏짚과 한지를 꽂은 새끼줄로 감아 놓았다.

영주시 평은면 금광리의 성황당은 ‘성황당’과 ‘미륵당’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특징이다. 과거 영주시 평은면 금광리에 있었던 금광사 석불좌상을 옮겨왔다는 미륵당은 마을 뒤편 야산의 솔숲에 남향으로 자리 잡은 단칸의 납도리집으로 지붕은 맞배지붕에 함석을 이었다. 출입문은 전면에만 두었다. 미륵당의 부처님이 과거에는 매우 영험하여 미륵당에 빌어서 자식을 낳은 사람이 많다고 한다. 성황당은 금광마을 뒤편 야산의 솔숲에 있다. 성황당 규모는 단칸이며 홑처마 맞배지붕에 3량가를 올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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