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604
한자 金欽祖
영어공식명칭 Kim Heum-jo
이칭/별칭 경숙(敬淑),낙금당(樂琴堂)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수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461년연표보기 - 김흠조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01년 - 김흠조 식년시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13년 - 김흠조 영천군수 부임
활동 시기/일시 1525년 - 김흠조 제주목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526년 - 김흠조 장예원판결사 제수
몰년 시기/일시 1528년연표보기 - 김흠조 사망
거주|이주지 김흠조 거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신천리 지도보기
부임|활동지 김흠조 부임지 - 경상북도 영천시
묘소|단소 김흠조 묘소 -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운문리 산46-1 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의성(義城)
대표 관직 예문관봉교|제주목사|장예원판결사

[정의]

조선 전기 영주 지역에 정착한 문신.

[개설]

김흠조(金欽祖)[1461~1528]는 예문관봉교·제주목사·장예원판결사 등을 지낸 문신이다. 1506년(중종 1) 사초(史草)를 열람한 이극돈(李克墩)[1435~1503]·유자광(柳子光)[1439~1512] 등에 대한 처벌과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화를 입은 김종직(金宗直)[1431~1492]·김일손(金馹孫)[1464~1498] 등에 대한 신원을 청원하였다.

[가계]

김흠조의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경숙(敬淑), 호는 낙금당(樂琴堂)이다. 『의성김씨대동보』에 따르면 김흠조의 아버지는 첨정을 지낸 김효우(金孝友), 어머니는 영인 임하임씨(臨河林氏), 할아버지는 종사랑 김용(金憃), 증조할아버지는 진사 김독(金篤)이며, 부인은 생원 정윤원(鄭允元)의 딸 숙부인 정씨(鄭氏)이다. 반면,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에는 김흠조의 본관이 예안(禮安), 할아버지는 김미손(金尾孫), 증조할아버지는 김신(金新)으로 기록되어 있다. 김흠조의 가문은 예안현 한곡(寒谷)에 세거하였는데, 김흠조 대에 영천군(榮川郡)으로 이주하였다. 현재 김흠조의 후손들은 지금의 영주시 이산면 신천리 일대에 세거하고 있다.

[활동 사항]

김흠조는 일찍이 훈도(訓導)를 지냈고, 1501년(연산군 7)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1506년(중종 1) 예문관봉교로 있으면서 폐쇄된 사찰의 복설을 지시한 중종에게 반대 의견을 진달하였다. 1506년 예문관 소속의 다른 관원들과 함께 연산군 때 사관(史官)의 일을 누설하고 공을 얻은 자들에 대하여 엄벌을 청원하였다. 예전에 사관이었던 김일손이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성종실록(成宗實錄)』의 사초로 수록하였는데, 1498년 훈구파들이 사초를 빌미로 무오사화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중종은 이를 받아들여 관련된 훈구파 인사를 유배시켰으며, 화를 입은 김종직 등의 가산은 모두 돌려주었다.

김흠조는 1509년 언양현감으로 있으면서 중종의 구언(求言)에 따라, 군정(軍丁)·공물(貢物)·역마(驛馬)·원악향리(元惡鄕吏) 등 시폐(時弊) 7개 조를 진달하였다. 1513년(중종 8) 아버지 봉양을 위해 외관직을 구해 영천군수(永川郡守)로 부임하였지만, 1514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그만두었다. 1525년(중종 20) 제주목사로 부임하였으며, 1525년 정의현과 대정현의 관아를 옮기는 일과 점마별감의 폐단을 진달하였다. 1526년 장예원판결사에 제수되었다.

[묘소]

김흠조 부부 묘소는 지금의 영주시 이산면 운문리 산46-1에 조성되었는데, 근래 영주-안동 간 국도 4차선 확장공사로 인한 묘지 이장 과정에서 복식류·문서류·사기류 등 3종 134점에 달하는 유물이 출토되었다. 김흠조 부부 묘 출토유물은 중요민속자료 제242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소수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