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요흠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615
한자 金堯欽
영어공식명칭 Kim Yo-heum
이칭/별칭 흠지(欽之),괴암(乖菴)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광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14년연표보기 - 김요흠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42년 - 김요흠 사마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49년 - 김요흠 정시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50년 - 김요흠 성균관박사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51년 - 김요흠 경차관 파견
활동 시기/일시 1652년 - 김요흠 전라도도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653년 - 김요흠 통례원봉례 제수
몰년 시기/일시 1656년연표보기 - 김요흠 사망
출생지 김요흠 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김요흠 이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하망동 지도보기
묘소|단소 김요흠 묘소 -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적덕리
성격 문신
성별
본관 함창(咸昌)
대표 관직 성균관박사|전라도도사|통례원봉례

[정의]

조선 후기 영주 출신의 문신.

[개설]

김요흠(金堯欽)[1614~1656]은 성균관박사·전라도도사·통례원봉례 등을 지낸 문신이다.

[가계]

김요흠의 본관은 함창(咸昌), 자는 흠지(欽之), 호는 괴암(乖菴)이다. 아버지는 진사 김우추(金遇秋), 어머니는 종사랑 송침(宋沉)의 딸 의인 야성송씨(冶城宋氏), 할아버지는 통덕랑 김도(金陶), 증조할아버지는 사재감참봉을 지낸 김응린(金應麟)이며, 부인은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류화(柳華)의 딸 숙인 전주류씨(全州柳氏)이다.

[활동 사항]

김요흠은 1614년(광해군 6) 경상도 영천군(榮川郡) 신천리(新川里)[지금의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 일대]에서 출생하였다. 숙부 김치추(金値秋)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1642년(인조 20) 사마시에 급제하였다. 1642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는데 정성을 다해 삼년상을 치렀다. 상이 끝난 후에는 집 옆에다 서실을 짓고 편액을 ‘괴암’이라 하였다. 김요흠은 평소 지역의 명사인 박회무(朴檜茂)[1575~1666]·배유장(裵幼樟)·나이준(羅以俊)·정칙(鄭侙)[1601~1663] 등과 교유하였다.

김요흠은 1649년(인조 27) 정시 문과에 급제하였고, 1651년 경차관으로 경상도에 파견되었다. 1652년에는 전라도도사로 부임하였는데, 공명함과 청렴함으로 도내 지방관들의 칭송이 높았다. 1653년 통례원봉례에 올랐다. 1653년 한양 삼청동에서 경상도 출신 인사들과 도회를 열었는데, 이날 모임은 「영남도회계첩도(嶺南道會契帖圖)」라는 그림으로 남겨졌다.

이후 붕당으로 정국이 혼탁해지자 김요흠은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왔으며, 어머니를 모시고 사례촌(沙禮村)[영주시 하망동 일대]으로 이거 하였다. 또 얼마 후에는 화동(禾洞)[영주시 하망동 일대]으로 이거해, 학문과 향촌 사회활동에 주력하였다. 당시 영천군의 조세는 단양군에서 수합되었는데, 풍랑으로 배가 전복하는 일이 발생해 거리가 더 먼 충주목 가흥창으로 조세 납부처가 변경되었다. 이 때문에 조세 납부의 고충이 가중될 우려가 생기자, 김요흠이 고을 대표로 상소문을 올려 단양군으로의 환원을 청원하였다. 1655년(효종 6) 흉년이 들자 순찰사에게 직접 구휼을 요청하였다. 또 향촌 교화를 위해 향약과 계를 조직하였다.

[학문과 저술]

김요흠의 유고로 6권 1책의 『소지세고(韶智世稿)』가 전한다. 『소지세고』는 아버지 김우추와 김요흠의 유고 및 행적을 엮은 「장소유고(長笑遺稿)」와 「괴암유고(乖菴遺稿)」로 구성되어 있다.

[묘소]

김요흠의 묘소는 봉화군 봉화읍 적덕리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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