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675
한자 洪翼漢
영어공식명칭 Hong Ik-han
이칭/별칭 백승(伯昇),화포(花圃),운옹(雲翁),습(霫)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병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86년연표보기 - 홍익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15년 - 홍익한 생원시 입격
활동 시기/일시 1624년 - 홍익한 정시 문과 장원급제
활동 시기/일시 1630년 - 홍익한 부안현감 부임
활동 시기/일시 1636년 - 홍익한 사헌부장령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37년 - 홍익한 평양부서윤 임명
몰년 시기/일시 1637년연표보기 - 홍익한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53년 - 홍익한 승정원도승지 추증
추모 시기/일시 1686년 - 홍익한 이조판서 추증
추모 시기/일시 1686년 - 홍익한 ‘충정’ 증시
추모 시기/일시 1705년 - 홍익한 영의정 추증 및 정려
추모 시기/일시 1964년 - 포의각 건립
출생지 홍익한 출생지 -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문단리
거주|이주지 홍익한 이주지 - 서울특별시
거주|이주지 홍익한 거주지 - 경기도 평택시
부임|활동지 홍익한 부임지 - 전라북도 부안군
부임|활동지 홍익한 부임지 - 평양직할시
묘소|단소 홍익한 묘소 -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본정리
사당|배향지 장암서원 - 경상북도 영주시
성격 문신
성별
본관 남양(南陽)
대표 관직 사헌부장령|평양부서윤

[정의]

조선 후기 영주 출신의 문신.

[개설]

홍익한(洪翼漢)[1586~1637]은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끌려가 순절한 삼학사(三學士) 중 한 명이다.

[가계]

홍익한의 초명은 습(霫), 자는 백승(伯升), 호는 화포(花浦)·운옹(雲翁),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찬성 홍숙(洪淑)[1464~1538]의 현손이며, 관찰사 홍서주(洪叙疇)[1499~1546]의 증손자이다. 할아버지는 현감 홍애(洪磑), 아버지는 진사 홍이성(洪以成)[1556~1606]이며, 어머니는 김림(金琳)의 딸 안동김씨(安東金氏)이다. 큰아버지인 교위 홍대성(洪大成)에게 15세 때 출계하였다. 첫 번째 부인은 정랑 구곤원(具坤源)[1550~1608]의 딸 능성구씨(綾城具氏)이며, 두 번째 부인은 군수 허식(許寔)의 딸 양천허씨(陽川許氏)이다.

[활동 사항]

홍익한은 1586년(선조 19) 경상도 영천군(榮川郡) 동쪽 원구촌[지금의 봉화군 봉화읍 문단리]에서 출생하였다. 15세 때 큰아버지 홍대성에게 출계함으로써 한양으로 이주하였다. 1615년(광해군 7) 생원이 되고, 1621년 알성문과에 급제했으나 파방되었다. 1624년(인조 2)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성균관전적·사헌부감찰을 거쳐 7월에는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왔다. 이때 해로를 이용하며, 당시의 기록을 『조천록(朝天錄)』으로 남겼다.

홍익한은 1625년 모함에 연루되어 삭탈관직 되었지만, 얼마 후 시강원사서로 복귀하였다. 이후 사간원정언·병조좌랑·병조정랑을 거쳐, 고령현감이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고령에서 출병하였으나 화의가 성립되어 되돌아갔다. 1628년 체직되어 고산찰방에 임명되었지만, 아버지의 병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1630년(인조 8) 부안현감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병조정랑으로 옮겼다가 병으로 물러나고는 수년간 정양하였다.

홍익한은 1636년(인조 14) 사헌부장령 겸 춘추관편수관이 되었다. 1636년에 청나라가 조선을 속국으로 여기는 모욕적인 조건을 내걸고 사신을 보내오자, 제호(帝號)를 참칭한 죄를 문책하고 청나라 사신들을 죽임으로써 모욕을 씻자고 상소하였다. 마침내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최명길(崔鳴吉)[1586~1647] 등의 화의론(和議論)을 극구 반대하였다. 병자호란으로 두 아들과 사위가 적에게 죽임을 당하였으며, 아내와 며느리는 자결하였다. 1637년 화의가 성립되자 조정의 권유로 평양부서윤으로 나갔지만, 척화파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오달제(吳達濟)[1609~1637]·윤집(尹集)[1606~1637]과 함께 청나라로 잡혀갔다. 청나라에서 홍익한은 청장 용골대(龍骨大)에게 “작년 봄에 네가 우리나라에 왔을 때 소를 올려 너의 머리를 베자고 청한 것은 나 한 사람뿐이다”라고 했고, 갖은 협박과 유혹에도 끝내 굽히지 않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학문과 저술]

홍익한은 이정구(李廷龜)[1564~1635]의 문인이다. 문장이 청건(淸健)하고 활달했으며, 저술이 수천 편에 이른다고 하나 병자호란 당시 거의 산실 되고, 약간의 시문과 「항해록(航海錄)」, 「북행일기(北行日記)」, 「서정록(西征錄)」 등이 문집인 『화포집(花圃集)』에 수록되어 있다.

[묘소]

홍익한의 처형 장소나 매장처가 확실하지 않아 평소에 타던 안마와 의금(衣衾)만을 수습하여, 경기도 평택 서쪽 경정리에 장사 지냈었다. 홍익한의 묘를 1945년 해방 이후 지금의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본정리의 현재 위치로 이장하였다. 홍익한 묘역은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5호로 지정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홍익한은 1653년(효종 4) 승정원도승지에 추증되고, 다시 1686년(숙종 12)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충정(忠正)’이란 시호가 내렸다. 1705년(숙종 31)에 다시 영의정에 추증되고, 아울러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영주 장암서원(壯巖書院), 광주(廣州) 현절사(顯節祠), 강화 충렬사(忠烈祠), 홍산 창렬서원(彰烈書院), 부안 도동서원(道東書院), 고령 운천서원(雲川書院), 평양 서산서원(西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송시열(宋時烈)[1607~1689]이 전기·행장·신도비명을 짓고, 이재가 묘표를 지었으며, 이의현(李宜顯)[1669~1745]이 묘표 음기를 지었다. 1964년 비각인 포의각(褒義閣)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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