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775
한자 林鳳柱
영어공식명칭 Im Bong-ju
이칭/별칭 임세규(林世圭),임동근(林東根)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9년연표보기 - 임봉주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7년 - 임봉주 장승원 암살
활동 시기/일시 1918년 - 임봉주 박용하 암살
몰년 시기/일시 1921년연표보기 - 임봉주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3년연표보기 - 임봉주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출생지 임봉주 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시 봉현면 노좌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임봉주 거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봉현면 노좌리 지도보기
활동지 임봉주 활동지 - 경상북도 영주시 봉현면 노좌리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임봉주(林鳳柱)[1879~1921] 대한광복회에서 친일 부호 암살 및 군자금 모집 등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가계]

임봉주의 본명은 임세규(林世圭)이며, 임동근(林東根)이라는 이명을 사용하기도 했다. 1879년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봉현면 노좌리에서 출생하였다.

[활동 사항]

임봉주는 일찍이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에 가입한 후, 행형부(行刑部)에 소속되어 친일 부호 처단 등 의협 투쟁의 선봉에 섰다. 1915년 대한광복단이 조선국권회복단의 일부 인사들과 제휴하여 대한광복회라는 혁명단체를 결성하자, 임봉주도 여기에 참여하였다. 대한광복회는 국내에서 군자금을 조달하여 만주의 독립군 기지에서 혁명군을 양성하고, 국내 혁명 기지를 거점으로 적당한 때에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 과정에서 대한광복회는 군자금 조달, 독립군 및 혁명군의 기지 건설, 총독 및 친일 부호 처단 등의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임봉주는 1917년 11월 10일 채기중(蔡基中)[1873~1921]·유창순(庾昌淳)[1876~1927]·강순필(姜順必)[1884~1921] 등과 함께 ‘장승원암살사건(張承遠暗殺事件)’에 가담하였다. 경북 칠곡의 친일 부호 장승원은 허위(許蔿)[1854~1908]가 의병을 일으켰을 때, 군자금을 제공하기로 했던 약속을 끝내 지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당시 경북 지역의 대표적인 친일적 인물로 활동했기 때문에 처단되었다. 이 거사는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시도되었다. 1916년 8월 6일 거사는 장승원이 부재중이라 실패하였고, 1916년 8월 11일 다시 시도했던 거사는 장승원의 집에 소작인들이 집결해 있어 실행하지 못했다. 마지막 1917년 11월 10일 거사에서 임봉주채기중·강순필·유창순과 함께 장승원 처단에 성공하였고, 「처단고시문」을 붙임으로써 그 명성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임봉주는 1918년 1월 13일에는 김한종(金漢鍾)[1883~1921]·장두환(張斗煥)[1894~1921]·김경태(金敬泰)[1874~1921] 등과 함께 도고면장 ‘박용하암살사건(朴容夏暗殺事件)’에 참여하였다. 충남 아산의 도고면장 박용하는 친일 면장으로 충남 지역에서 악명이 높았다. 또 대한광복회가 군자금 모집을 위해 보낸 통고문을 헌병에게 넘겨주었던 적이 있었다. 이에 대한광복회 충청지부의 김한종은 일찍부터 박용하를 처단할 계획을 하고 있었다. 이에 임봉주는 김한종의 지시를 받은 김경태와 함께 권총 1정씩 휴대하고, 도고면에 있는 성문영(成文永)[1887~1961]의 집에 모였다. 이 자리에서 임봉주 등은 대한광복회의 「사형선고문」에 박용하의 이름을 기입한 후, 1월 13일 박용하의 집으로 찾아갔다. 임봉주는 김경태와 함께 대한광복회 명의의 「사형선고문」을 박용하에게 제시하였다. 박용하는 군자금을 내겠으니 이를 연기해 달라고 했으나, 좌측 복벽부를 사격하여 즉사시켰다.

그 외에도 임봉주는 대한광복회의 「통고문」을 각처 부호들에게 발송하여 군자금 모집에 참여하였다. 1917년 음력 10월경에는 안동 읍내에서 군자금 모집에 참여해 달라는 채기중의 부탁을 받고, 신창균(申昌均)과 함께 안병국(安秉國)·류승호(柳升鎬)로부터 군자금을 받았다.

임봉주는 1918년 봄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발각되자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임봉주를 비롯하여 대한광복회 회원 19명은 「보안법」 위반 및 공갈·살인·방화·강도·총포·화약류 취체령 위반으로 기소되어, 1919년 2월 28일 공주지방법원 예심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상고하였다. 그러나 1919년 9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사형이 확정되었다. 1921년 8월 11일 박상진과 김한종은 대구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으며, 임봉주는 김경태와 함께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임봉주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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