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흠(黃鼎欽)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804
한자 黃鼎欽
영어공식명칭 Hwang Jeong-heum
이칭/별칭 이경(耳敬),후송(後松),황승흠(黃昇欽)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영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9년연표보기 - 황정흠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황정흠 풍기면 만세시위운동 참여
몰년 시기/일시 1955년연표보기 - 황정흠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2년연표보기 - 황정흠 대통령표창 추서
출생지 황정흠 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백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황정흠 거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백리 지도보기
활동지 황정흠 활동지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성내리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 독립운동가.

[개설]

황정흠(黃鼎欽)[1889~1955]은 1919년 4월 9일 영주군 풍기면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가계]

황정흠의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이경(耳敬), 호는 후송(後松), 이명은 황승흠(黃昇欽)이다. 대사헌을 지낸 황섬(黃暹)[1544~1616]의 11대 종손이며, 아버지는 황재석(黃在錫)이다.

[활동 사항]

황정흠은 1889년 지금의 영주시 풍기읍 백리에서 출생하였다. 황정흠은 1919년 고종이 흉거하자, 은혜를 위해 만세운동을 일으키고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침내 1919년 4월 9일 오후 3시 30분경 지금의 영주시 풍기읍 성내리의 풍기장날을 이용하여 안용호(安容鎬)[1884~1942]·최성원(崔盛源)[1894~1926]·남영진(南永鎭)[1894~1920] 등이 만세운동을 일으키자 참여하였다.

황정흠은 시위 군중 100여 명과 함께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풍기주재소를 향해 행진하였다. 그러나 순찰 중이던 일본군 헌병들에 의해 주동자 안용호·남영진·최성원 3인이 주재소로 붙잡혀 가자, 분개하여 김용준(金容俊)[1873~1932]·남상필(南相弼)[1891~1972]·황정흠(黃政欽)[1881~1949]·이화백(李和伯)[1884~1968] 등과 함께 시위 군중 약 50명을 선도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주재소 앞으로 행진하였다. 주재소 앞으로 다가가자 안용호·최성원·남영진을 체포하고 철수하려던 일본 헌병들에 의해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황정흠은 주재소에서 자신을 취조하던 헌병 보조원에게 “우리 한국을 어떻게 하든지 독립을 시켜보려고 생각한다. 너희 보조원은 조선 500년의 음덕으로 살아오지 않았는가? 나와 마음을 합하여 같은 행위를 취하는 자는 더 없는 좋은 기회인데 슬픈 일이다”라고 말하며 민족적 양심을 주장하였다.

1919년 4월 19일 황정흠은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선고받았다. 이에 항소하였고, 5월 1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부분적으로 취소되었으나, 징역 8월이 확정되어 대구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저술 및 작품]

황정흠의 작품으로 옥중에서 쓴 「만세가병산서(萬歲歌幷山序)」 2편이 전한다.

[상훈과 추모]

황정흠은 1992년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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