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기면 만세시위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354
한자 豊基面萬歲示威運動
영어공식명칭 Independence Demonstration Movement in Punggi-myeon
이칭/별칭 풍기면 3.1운동,풍기읍 만세시위운동,풍기장터 만세운동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영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단 시기/일시 1919년 4월 3일연표보기 - 풍기면 만세시위운동 계획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4월 9일연표보기 - 풍기면 만세시위운동 시작
전개 시기/일시 1919년 4월 9일연표보기 - 풍기면 만세시위운동 전개
종결 시기/일시 1919년 4월 9일연표보기 - 풍기면 만세시위운동 종결
발생|시작 장소 풍기장터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지도보기
종결 장소 풍기헌병주재소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
관련 인물/단체 안용호|최성원|남영진|이화백|김용준|남상필|황정흠(黃鼎欽)|황정흠(黃政欽)

[정의]

1919년 4월 9일 영주 지역의 풍기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운동.

[개설]

풍기면 만세시위운동은 영주군 봉현면 농민 안용호(安容鎬)·남영진(南永鎭)·최성원(崔盛源)이 주도하였다. 안용호·남영진·최성원은 1919년 4월 9일 영주군 풍기면 장터에서 준비한 태극기를 가지고 오후 3시 무렵 만세시위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출동한 일본군 헌병들에 의해 안용호 등 주도자들이 체포되었다. 한편, 풍기면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했던 황정흠(黃鼎欽)·김용준(金容俊)·남상필(南相弼)·이화백(李和伯)·황정흠(黃政欽) 등이 시위를 계속 주도하였으나 출동한 일본 헌병들에게 시위 군중은 해산되고 황정흠 등 주동 인물들이 붙잡히면서 풍기면 만세시위운동은 종결되었다.

[역사적 배경]

풍기면 만세시위운동을 처음 계획한 인물은 영주군 봉현면 대촌동[현 영주시 봉현면 대촌리]에 사는 안용호였다. 안용호는 평소 일제의 식민통치와 경제적 침탈에 반감이 있었으며, 특히 과중한 세금에 큰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전국 각지에서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운동이 일제로부터 독립할 기회라고 생각하고 거사를 주동하였다. 따라서 풍기면 만세시위운동은 봉현면 대촌동 농민들의 조세 저항적 성향이 주요한 배경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과]

풍기면 만세시위운동은 1919년 4월 9일 풍기장날에 일어났다. 이날 풍기면 만세시위운동을 주동한 인물은 영주군 봉현면 대촌동에 거주하던 안용호·남영진·최성원 등 농민들이었다. 안용호는 1919년 4월 3일 평소 잘 알고 지내던 같은 마을 최성원의 집을 찾았다. 마침 최성원 옆집에 사는 남영진도 와 있었다. 안용호·남영진·최성원은 4월 9일 풍기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풍기장(豊基場)을 선택한 것은 풍기와 인접한 상리·순흥·봉현·안정·단산·부석 등 당시 영주군 각 면의 주민들이 모여들어 큰 장이 형성되기 때문이었다.

안용호·최성원·남영진은 태극기 제작 등 시위를 준비하였다. 마침내 1919년 4월 9일 준비한 태극기를 숨겨 풍기장터로 들어갔다. 1919년 4월 9일 오후 3시 무렵 군중이 가장 많이 모이는 쌀시장을 중심으로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운동을 펼쳤다. 호응하는 군중 100여 명과 함께 시위 행렬에 나서려고 하는데, 갑자기 달려온 일본 헌병과 수비병들에 의해 제지당하였다. 이때 안용호·남영진·최성원 3명은 주도자로 일본군에게 풍기헌병주재소로 잡혀갔다.

풍기면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했다가 안용호 등이 잡혀가는 모습을 본 황정흠(黃鼎欽)·김용준·남상필·이화백·황정흠(黃政欽) 등은 다시 50여 명 군중을 이끌고 풍기헌병주재소 앞으로 진행하여 만세시위를 선도하였다. 그러나 안용호 등을 붙잡아 간 뒤 철수하려던 헌병들이 다시 출동함으로써 군중은 해산당했고, 황정흠 등 주도 인물이 잡히면서 풍기면 만세시위운동은 종결되었다.

[결과]

풍기면 만세시위운동 주도자들은 풍기헌병주재소로 잡혀갔다가,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태 90도 또는 징역 8월에서 1년 6월의 선고받고 각각 옥고를 치렀다.

[의의와 평가]

풍기면 만세시위운동은 세 가지 측면에서 눈길을 끈다. 하나는 영주군 봉현면 대촌동의 농민들이 주도하였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일제의 경제적 침탈 곧 과중한 조세에 대한 농민적 불만이 만세운동으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풍기면 만세시위운동은 한차례로 끝나지 않고, 호응하던 군중들에 의해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는 점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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