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808
한자 金俊相
영어공식명칭 Kim Jun-sang
이칭/별칭 김정상(金禎相)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10년연표보기 - 김준상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27년 3월 - 김준상 풍기공립보통학교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27년 4월 - 김준상 경성제2고등보통학교 입학
활동 시기/일시 1928년 3월 - 김준상 영주청년동맹 풍기지부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29년 3월 - 김준상 영주농민조합 가입
활동 시기/일시 1929년 12월 - 김준상 신간회 영주지회 가입
활동 시기/일시 1930년 - 김준상 영주 1차 격문 투쟁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32년 4월 - 김준상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 참여
출생지 김준상 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 지도보기
학교|수학지 풍기공립보통학교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지도보기
학교|수학지 경성제2고등보통학교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활동지 김준상 활동지 - 경상북도 영주시
성격 독립운동가|사회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 회원

[정의]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김준상(金俊相)[1910~?]은 1920년대 후반 영주청년동맹신간회 영주지회에서 활동하였으며, 1930년 영주 1차 격문 투쟁에 참여하였다. 1930년대 전반기에는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 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가계]

김준상은 1910년 지금의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에서 출생하였다. 김정상(金禎相)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다.

[활동 사항]

김준상은 1927년 3월 풍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27년 4월에는 경성제2고등보통학교 입학하였다. 이후 고향 영주 지역으로 돌아와 농업에 종사하며, 1928년 3월에는 영주청년동맹 풍기지부에 참가했다. 이어 1929년 3월에는 영주농민조합, 12월에는 신간회 영주지회에도 가입하였다. 이 무렵 영주에서 한해(旱害)가 발생하게 되자, 구제연설회 남대(南隊)에 편성되어 장수면평은면을 맡았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은 영주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에 김준상이 속한 영주청년동맹은 수차례에 걸쳐 격문 투쟁을 전개하였다. 영주청년동맹은 광주학생운동이 발생한 직후인 1929년 11월 13일 제6회 집행위원회를 열고 ‘광주학생충돌사건’을 조사하기로 한 바 있다. 1930년 2월 영주청년동맹김준상안기석(安基錫)[1897~1968]이 작성한 두 종류의 격문을 작성하여 살포했다. 격문의 제목은 「학생제군에게」와 「전조선적 학생 대검거와 조선총독 폭압정치 및 야만적 경찰의 압박에 전조선 피압박계급 대중은 일제히 분기하자」였다. 이른바 영주 1차 격문 투쟁이 일어난 것이다. 영주 1차 격문 투쟁으로 말미암아 일경은 대대적인 검거에 착수하였고, 1930년 2월 김준상영주청년동맹 간부 6명이 보안법 위반, 출판법 위반, 가택침입 등의 죄명으로 대구지방법원 안동검사분국으로 송치된 뒤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이송되었다. 1930년 7월 9일 결국 대구지방법원에서 주거침입,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죄로 징역 10개월을 언도받았다.

1931년 9월 김봉호(金鳳鎬)[1884~1950]·김계등(金季登)[1907~?]·박병성(朴炳星)[1904~?]·정규찬 등이 농민운동과 반제동맹을 전개하기 위해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는데, 이때 김준상은 일경의 감시를 받는 김봉호를 대신해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하였다. 그런 가운데 1931년 10월경 김준상김계등·김화진(金華鎭)[1904~1946]·박병성 등과 함께 지금의 영주시 고현동휴천동 일대의 소나무 숲 등지에서 회합했다. 1932년 4월에는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를 조직하였는데, 김준상김계등·김화진과 함께 혁명적농민조합 조직을 맡았다.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가 조직하려는 혁명적농민조합의 목적은 노동자·농민에 의한 독재 정부 수립에 있었다. 아울러 반제동맹을 통해 ‘조선의 독립을 도모하고 동시에 조선혁명의 현 단계인 농업혁명의 실현’을 달성하고자 했다. 이후 일제의 만주 침략이 시작되자,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는 만주 침략이 일본제국주의 몰락의 시작이 될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출병 반대’, ‘제국주의 전쟁 반대’, ‘소비에트 러시아 사수’, ‘중국혁명 지지’ 등을 강조해 나갔다. 그리고 예천무명당(醴泉無名黨) 및 봉화적색농민조합(奉化赤色農民組合)과 연대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김준상은 예천무명당의 주요 구성원인 한일청(韓一淸)[1899~1960]을 만나 연대를 끌어내기도 했다.

김준상 등의 이러한 움직임을 일본 경찰도 예의주시하였다. 결국, 1932년 7월경 경상북도경찰부 고등과 형사와 영주경찰서 및 봉화경찰서 경찰에 의해, 김준상 등 100여 명이 검거되었다. 1932년 9월 19일 김준상 등 73명이 대구지방법원에 송치되었는데, 김준상 등 12명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예심에 회부되고, 34명은 기소유예 처분, 나머지는 기소중지 내지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1933년 12월 2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언도받고,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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