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981
한자 榮州紹修書院
영어공식명칭 Sosu Confucian Academy, Yeongju
이칭/별칭 백운동서원,소수서원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소백로 2740[내죽리 151-2]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자운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542년연표보기 - 백운동서원 문성공묘 건립
건립 시기/일시 1543년연표보기 - 백운동서원 건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544년 - 백운동서원 안축·안보 배향
관련 사항 시기/일시 1550년 - 소수서원으로 사액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33년 - 소수서원 주세붕 배향
개축|증축 시기/일시 1947년 - 영주 소수서원 관리사무소 설치
문화재 지정 일시 1963년 1월 21일연표보기 - 영주 소수서원 사적 제55호 지정
개축|증축 시기/일시 1974년 - 영주 소수서원 중수
개축|증축 시기/일시 1982년연표보기 - 영주 소수서원 유물관 건립
개축|증축 시기/일시 1986년 - 영주 소수서원 취한대 신축
개축|증축 시기/일시 1991년~1992년 - 영주 소수서원 사료 전시관 및 충효관 건립
문화재 지정 일시 2004년 4월 6일 - 영주 소수서원 문성공묘 보물 제1402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04년 4월 6일 - 영주 소수서원 강학당 보물 제1403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11년 7월 28일 - 소수서원에서 영주 소수서원으로 개칭
문화재 해지 일시 2011년 7월 28일연표보기 - 소수서원 지정 해제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9년 7월 6일연표보기 - 영주 소수서원 ‘한국의 서원’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영주 소수서원 사적 재지정
현 소재지 영주 소수서원 -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소백로 2740[내죽리 151-2]지도보기
성격 서원
양식 겹처마 팔작지붕[강학당]|홑처마 팔작지붕[직방재·일신재]|홑처마 맞배지붕[학구재]|홑처마 맞배지붕[장서각]|홑처마 맞배지붕[문성공묘]|홑처마 맞배지붕[전사청]|홑처마 팔작지붕[경렴정]
정면 칸수 4칸[강학당]|6칸[직방재·일신재]|3칸[학구재]|3칸[지락재]|2칸[장서각]|3칸[문성공묘]|3칸[전사청]|3칸[경렴정]
측면 칸수 3칸[강학당]|1.5칸[직방재·일신재]|1칸[학구재]|2칸[지락재]|1칸[장서각]|2칸[문성공묘]|1칸[전사청]|2칸[경렴정]
소유자 영주시
관리자 영주시
문화재 지정 번호 사적

[정의]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

[개설]

영주 소수서원(榮州紹修書院)은 1542년(중종 37) 주세붕(周世鵬)이 풍기군수에 부임하여 안향(安珦)을 모시는 문성공묘를 세우고 안향의 영정을 봉안한 뒤, 1543년 강학당(講學堂)을 지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라 이름하였다. 이후 풍기군수 이황(李滉)의 건의로 1550년(명종 5) ‘소수서원’이라는 편액을 받아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다.

[위치]

순흥면행정복지센터에서 순흥로 북쪽 방면으로 이동한 뒤, 읍내교차로에서 소백로 북동쪽 방면으로 700m 정도 직진하면, ‘영주 소수서원’ 표지판과 함께 오른쪽에 주차장이 나온다. 주차장 뒤편 영귀봉 아래 영주 소수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백운동서원 창건]

소수서원주세붕이 풍기에 세웠던 백운동서원이 사액을 받으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풍기는 중국에서 처음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들여온 안향의 자취가 어린 곳이었다. 주세붕은 이러한 유서가 깃든 곳에 향교가 황폐해진 것을 보고 우선 퇴락한 향교의 중건에 착수하였고, 향교 이건이 끝나자 1542년 봄에 바로 문성공묘 건립을 시작하여 그해 8월 준공하고 회헌 영정을 봉안하였으며, 1543년 백운동서원을 건립하였다.

1543년 9월, 백운동서원의 규모가 어느 정도 갖추어지자 주세붕은 지역 출신 인물인 안축(安軸)안보(安輔) 형제를 배향하였다. 1544년 8월 주세붕은 서원의 학전(學田)과 보미(寶米)를 마련하고, 사묘를 건립하면서 숙수사지의 땅을 파다 나온 놋쇠 120여 근으로 사서삼경(四書三經)과 『이정전서(二程全書)』, 『주자대전(朱子大全)』 등의 서적을 사들여 서원에 비치함으로써, 백운동서원은 비로소 학교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후일 이 같은 공을 인정받아 주세붕은 1633년(인조 11) 소수서원에 추가로 배향되었다.

[백운동서원의 운영 기반 구축]

1546년(명종 1)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한 안현(安玹)은 서원 운영을 위한 제반 규정과 재정적인 기초를 확립하였다. 안현은 십여 칸에 불과하던 서원 건물을 삼십여 칸으로 증축하고, 노비 12구와 양인 4~5명을 서원 관리인으로 사역하도록 하였으며, 서원 토지 30결을 지정하여 이를 경작하는 자들에게 잡역을 면제하는 대신 서원의 땔감을 마련하도록 하였다. 다음으로 유생에 대한 지원 조처로서 해안 지역의 물고기 잡는 틀 3곳과 소금 굽는 곳 2곳의 산물을 바치게 하고 종이·붓·먹·기름 같은 문방구류는 각 고을에 적정 수량을 분배하여 차질 없이 조달하게 하였다. 또한, 이러한 조처를 영속화하기 위해 서원 운영 전반을 규정한 「사문입의(斯文立議)」를 제정함으로써,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서원 운영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비로소 마련되었다.

[퇴계 이황과 소수서원 사액]

백운동서원이 창건된 지 8년째 되는 해인 1550년에 국가로부터 ‘소수서원’이란 사액을 받게 된다. 소수서원 사액을 조정으로부터 끌어낸 인물은 이황이었다. 이황은 1548년(명종 3) 11월 풍기군수로 부임한 뒤 서원에 자주 들러 제생들과 함께 주자학을 강론하였으며, 향사 제도를 개정하고 취한대를 세우는 등 백운동서원 정비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서원이 조선 사회에 정착, 보급되기 위해서는 백운동서원에 대한 국가의 공인과 장려가 필요하였다. 이황은 경상감사 심통원에게 편지를 보내 중국 송나라의 고사를 따라 백운동서원에 편액을 내리고 서적 및 토지·노비의 지급을 임금님께 요청해 주기를 청하였다. 마침내 사액이 결정되어 1550년 4월 신광한이 지은 「소수서원기」와 함께 소수서원의 편액이 내려왔다. 국가에서 사액을 받은 소수서원의 존재는 국내에 널리 알려져 전국에서 유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소수서원은 초창기 서원의 대표적 존재가 되었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훼철되지 않고 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형태]

영주 소수서원은 서원의 배치 형식으로 볼 때 일정한 규칙성을 발견할 수 없는 초기형에 속한다. 영주 소수서원은 전면에 사당 영역과 강학 영역이 자리 잡고 있고, 가운데 부분은 고직사 영역과 사료관이 있으며, 후면에는 충효교육관과 소수서원 관리사무소가 자리 잡고 있다. 전면의 사당 영역과 강학 영역을 제외하고 나머지 공간은 최근에 복원 및 신축된 건물이다.

영주 소수서원의 정문인 지도문(志道門)을 들어서면 정면에 강학 공간의 중심 건물인 강학당이 자리 잡고 있다. 명륜당(明倫堂)이라고도 하며, 「백운동(白雲洞)」 현판이 걸려있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강학당 뒤로 직방재(直方齋)·일신재(日新齋)가 있는데, 원장·교수 및 유사들의 집무실 겸 숙소이다. 동재와 서재가 각각 독립된 건물이 아닌 양재가 한 동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건물로, 편액으로 구분하고 있다. 강학당과의 동선을 고려해 바로 뒤에 배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면 6칸, 측면 1칸 반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직방재·일신재 동쪽으로 학구재(學求齋)와 지락재(至樂齋)가 있고, 서쪽으로 장서각(藏書閣)이 있다. 학구재는 유생들이 기거하면서 공부하던 곳으로, 동몽재(童蒙齋)라고도 한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지락재는 학구재와 함께 유생들이 기거하며 공부하던 곳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학구재와 직교되게 하여 ㄱ자형 배치를 이룬다. 학구재는 직방재·일신재보다 낮게 배치하고, 지락재는 학구재보다 낮게 배치한 것이 주목한다. 장서각은 영주 소수서원의 경판과 서적 등을 보관하는 장소로 정면 2칸, 측면 1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강학 공간의 서쪽으로 제향 공간의 중심인 문성공묘가 자리 잡고 있다. 기와를 얹은 돌담으로 일곽을 이루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장서각 뒤로 제향 때 제수 준비를 하거나 보관하는 공간인 전사청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영주 소수서원 입구 오른쪽으로 죽계를 마주하며 경렴정(景濂亭)이 있다. 경렴정은 영주 소수서원 건립 초기에 지어진 건물로, 원생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정자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개방된 정자 형식이다. 죽계 건너에는 백운동과 경(敬)을 음각한 바위가 있고, 그 아래쪽에 1985년부터 1986년에 걸쳐 복원한 취한대(翠寒臺)가 있다.

[현황]

영주 소수서원은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55호 ‘소수서원’으로 지정되었다가 2011년 7월 28일 ‘영주 소수서원’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2004년 4월 6일 영주 소수서원 문성공묘가 보물 제1402호, 영주 소수서원 강학당이 보물 제1403호로 지정되었다. 영정각에는 안향 초상[국보 제111호]과 주세붕 초상[보물 제717호]의 모사본을 봉안하고 있다. 영주 소수서원은 2019년 7월 6일 ‘한국의 서원’ 9곳 중 하나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사적으로 재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영주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으로 국가에서 최초로 사액을 받아 조선의 서원이 일개 고을의 시골 학교나 한 지방관 개인의 흥학 활동 차원에 머물지 않고, 국가의 공인과 지원으로 지속해서 발전할 수 있는 공적·제도적 기반을 확보했다. 또한, 국가의 하사, 개인의 기증 혹은 영주 소수서원 자체에서 마련한 영정, 장서, 목판, 편액 등 다양한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다. 특히 창건 당시부터 각별한 관심과 노력으로 수집, 관리된 수많은 장서 및 16세기 이래 영주 소수서원의 재정, 운영, 강학 현황을 기록한 다양한 고문헌들은 조선 서원 연구의 좋은 사례가 된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0.04.21 영주 소수서원 형태 수정 유물관을 사료관으로, 순흥문화유적권관리사무소를 소수서원관리사무소로 수정
이용자 의견
사*** [형태]
유물관을 사료관으로 수정, 순흥문화유적권관리사무소를 소수서원관리사무소로 수정
  • 답변
  • 디지털영주문화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청한 내용에 대하여 확인 후 수정하였습니다. 의견 개진에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2020.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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