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1203
한자 義湘-善妙-久遠-
영어공식명칭 An Ever Lasting Love of Uisang and Seonmyo(Folktale)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로 345[북지리 148]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은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수록|간행 시기/일시 2010년 - 「의상과 선묘의 구원의 사랑」 『영주시사』2에 「의상과 선묘의 구원의 사랑」으로 수록
관련 지명 부석사 -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로 345[북지리 148]지도보기
관련 지명 선묘각 -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로 345[북지리 148]지도보기
관련 지명 부석 -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로 345[북지리 148]지도보기
관련 지명 석룡 -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로 345[북지리 148]지도보기
성격 설화|인물담
주요 등장 인물 의상|선묘|원효대사|유지인|지엄대사
모티프 유형 고승에 대한 존경과 사모|불심의 영험함

[정의]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에 있는 부석사 창건과 관련해 전해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의상과 선묘의 구원의 사랑」의상(義湘)[625~702]이 태어나서 출가하고, 당나라에 다녀와서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하기까지 과정을 담고 있다. 그 사이에 의상을 간호하고 의상의 바닷길을 인도하였으며, 용이 되어 이교도 무리를 몰아낸 선묘(善妙)의 역할이 컸음을 보여줌으로써, 현재 부석사에 선묘각(善妙閣)이 있는 이유도 설명하고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송고승전(宋高僧傳)』에도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건들이 언급되어 있다.

[채록/수집 상황]

「의상과 선묘의 구원의 사랑」은 2010년 영주시사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영주시사』2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의상은 625년(진평왕 47) 신라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호화롭게 성장하다가, 19세에 경주 황복사에서 출가하여 입산수도했다. 입산한 지 8년 만에 큰 뜻을 품고 원효(元曉)[617~686]와 함께 당나라로 향했다. 원효는 당나라로 가던 길에 어둠 속에서 달게 마신 물이 해골 물이었음을 알고 역겨움을 느낀 뒤, 깨달은 바가 있어 발길을 돌려 귀국한 뒤 불교 연구에 힘썼다. 그러나 의상은 홀로 당나라를 향해 길을 떠났다. 고구려군에 잡혀 고생하다가 돌아오고, 다시 길을 떠나 당나라 사신의 배를 타고 당나라에 도착했다.

양주에 당도한 의상은 신병을 얻게 되어 양주성 수위장 유지인(劉至仁)의 집에 머무르며 병을 치료했는데, 그 집 딸 선묘의상을 사모하게 되었다. 의상선묘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법도로 대하여 제자로 삼았다. 선묘의 정성으로 몸이 완쾌된 의상이 다시 길을 떠나려 하자 선묘의상에게 귀국할 때 꼭 다시 한번 들러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의상은 승낙하고 다시 길을 떠났다.

얼마 후 의상은 종남산 지상사에 가서 지엄대사의 제자가 되어 수학하던 중 당이 신라를 침범하려 함을 알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급히 귀국하게 되었다. 귀로에 선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선묘의 집에 들렀으나 선묘는 출타 중이어서 그녀를 만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선묘의상의 귀국 선물로 법의(法衣)를 준비해 두었는데 집에 돌아와 의상이 떠난 사실을 알고 선물을 들고 의상의 뒤를 쫓았다. 지금 산둥성[山東省] 해안에 다다르니 의상이 탄 배는 이미 떠나 저 멀리 흰 돛만 보일 뿐이었다. 어찌할 방도가 없자 선묘는 선물을 바다에 던지며 그 옷이 의상에게 이르기를 축원하였다. 놀랍게도 해풍이 크게 일어나면서 던진 옷이 의상이 탄 배 안으로 날아갔다. 이를 본 선묘는 다시 “이 몸이 용이 되어 의상조사를 받들어 무사히 귀국하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축원하면서 바닷물에 몸을 던졌다. 과연 선묘는 용이 되어 의상의 귀국길을 호위하였다. 의상은 무사히 귀국하여 나라에 당의 침략 흉계를 고하고 난을 면하게 하였다.

그 후 의상은 왕으로부터 사찰을 건립하라는 명을 받았다. 지금의 영주 봉황산에 이르러 지세를 보니 화엄종지를 크게 선양할 수 있는 명산이었다. 그러나 이교(異敎)의 무리가 먼저 이곳을 차지하고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그때 용으로 화신한 선묘가 법력을 써 큰 바위를 공중으로 올렸다 내렸다 세 차례를 하였더니 무리가 겁을 먹고 굴복하였다. 이 자리에 건립한 사찰이 부석사이며, 큰 바위는 ‘부석(浮石)’이라 불리며 지금도 무량수전 서편 암벽 밑에 거대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선묘룡은 석룡(石龍)으로 화하여 무량수전의 자리에 안좌되어 부석사의 수호신이 되려 하니 의상이 크게 감격하였다. 지면에서 2척 깊이에 묻혀 있는 48척의 석룡은 그 머리를 무량수전 주불(主佛) 밑에 두고 꼬리는 무량수전 앞 석등까지 펼쳐져 있다. 이 석룡은 1960년대 학술조사단이 무량수전 앞뜰에서 발굴하여 5m가량의 석룡 하반부를 발견하는 데 성공하였다. 비늘 모습까지 아련히 나타나 있는 그 모습은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용과 너무나 흡사하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의상과 선묘의 구원의 사랑」의 주요 모티프는 고승에 대한 존경과 사모, 불심의 영험함이다. 선묘의상조사에 대한 존경과 사모의 마음으로 의상을 간호하고 용이 되어 그를 도왔다. 부석사 창건의 과정에는 의상의 불심과 의상에 대한 선묘의 고귀한 사랑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야기 말미에 석룡의 실체에 관해 서술함으로써 설화에 신빙성을 더해 준다.

[참고문헌]
  • 『영주시사』 2(영주시사편찬위원회, 2010)
  • 영주문화원(http://www.yjcc.or.kr)
  •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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