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1323
한자 豊基-失鄕民-豊基人絹
영어공식명칭 Displaced Person of Punggi and Punggi Viscose Rayon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인균

[정의]

경상북도 영주 지역의 순수 천연섬유인 풍기인견에 관한 이야기.

[개설]

풍기인견(豊基人絹)은 1934년 평안남도 덕천 지역에서 명주공장을 운영하던 일부 월남(越南)인들에 의해 영주군 풍기면 동부동에서 시작하였으며, 한국전쟁 이후 급격히 발전하여 풍기를 대표하는 전통산업으로 자리 잡았다. 다른 지역에서 보기 힘든 월남민들과 풍기 주민들 간의 화합으로 성공한 이식산업(移植産業)[출신 지역에서 옮겨온 산업]의 대표적 사례이다.

[풍기인견이란]

인류는 면, 마, 양모, 비단과 같은 천연섬유를 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인구의 급증으로 인한 섬유 수요의 증대는 자원과 생산에 제약이 있는 천연섬유가 아닌 인조섬유를 개발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대량생산이 가능한 대체 견직물에 대하여 발명을 하던 중 조면(繰綿)[목화에서 씨를 제거하고 섬유만 남게 하는 것] 후 남은 짧은 솜 부스러기와 펄프같이 길이가 짧아 직접 섬유 재료로 사용할 수 없는 셀룰로이드를 화학적인 방법으로 개발하였는데, 이것이 대체 견직물인 인견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풍기인견은 목재의 섬유질을 풀 먹임을 통해 재직하고, 이를 베틀 또는 기계를 활용하여 원단을 만든다. 풍기인견은 염색이 잘 되는 재질이어서 염색 과정을 거쳐 의복으로 제작이 되는데, 기존의 인견과는 달리 화학적 방법으로 제작하지 않아 알레르기성 피부, 아토피 피부 등을 가진 이들에게 좋은 옷감으로 취급되었다.

[풍기인견의 시작]

풍기인견의 시작은 월남민들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전해지나 자세한 이야기는 2010년 개간된 『영주시사』에서 찾을 수 있다. 과거 명주옷을 집마다 제작하여 입거나 매매하여 자급자족하였으나 가내수공업의 형태로 소규모 공장이 설립된 것은 1930년대 월남민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월남하여 영주군 풍기면 성내동[현 영주시 풍기읍 성내리]에 정착하고 거주하였던 송석홍, 서찬석, 배찬덕이 2층 200평 규모의 풍기방직을 세워 운영하였으나, 실패 후 송석홍이 독자적으로 풍기면 동부리 565에 500평의 부지를 매입하여 공장을 지은 것이 풍기인견의 시작이다. 이후, 원경준, 배찬덕, 서찬석 등도 공장을 설립하여 직조기계공장이 확장되어서 풍기직물공장조합이 1938년 조직됨으로써 풍기직물의 기반이 세워졌다.

광복 후 일본에 의한 직물 통제가 풀리게 되고, 1948년 이응두에 의해 펄프가 주원료인 인견 직물이 생산되어, 인견사로 양복의 안감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점차 풍기의 직물산업은 활발해졌고, 풍기의 산업은 직물에 달려있다시피 할 만큼 풍기 주민들 다수가 직물의 확장 및 성공에 노력하였다.

[풍기인견의 전성기]

풍기 지역의 풍기인견에 의한 전성기는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라 할 수 있다. 1974년 영주의 『통계연보』를 찾아보면 상주인구 2만 5491명 중 남자 1만 2615명, 여자 1만 2876명으로 남자와 여자의 비율이 비슷하다. 당시 여자 종업원들의 50% 이상이 다른 지역에서 이주하여 풍기인견을 제작하는 근로자로 활동하였기에 남녀 비율이 비슷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풍기라 하면 인삼이 대표적인 상품으로 취급되지만, 풍기인견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당시만 해도 베틀 짜는 소리가 공장과 마을 곳곳에서 시끄럽게 울렸다고 전해진다. 풍기인견은 영주 또는 경북에만 판매가 된 것이 아닌 서울, 대구, 부산 등 각지에 공급되어 판매되었으며, 양복의 안감이나 속옷 등의 제작에 주로 사용되었다. 기존 풍기인견은 수공업으로 생산되어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였으나, 1965년 박정학이 기계동력직기 100여 대를 설치함으로써 대량생산하였다. 이 시기부터 풍기인견은 전국 각지뿐만 아니라 일본으로 수출하였으며, 기존의 안감에 사용되던 방식에서 발전하여 무늬 또는 색을 입힘으로써 일상복에도 활용되기 시작하였다.

풍기인견의 확장으로 농공단지의 조성이 추진되었는데, 영주봉현농공단지영주일반산업단지 등이 1980년대에 조성되었다. 정부의 농공단지에 대한 지원에 힘입어 조성된 영주봉현농공단지는 1989년 11월 14일에 면적 3만 3235평으로 조성되었다. 영주봉현농공단지에는 풍기인견홍보전시관을 포함하여 21개의 기업체가 입주하였고, 2007년에는 368명의 종업원이 연간 409억 8천3백만 원의 매출을 올렸다.

[전통공업으로서의 풍기인견]

전통공업은 세 가지의 특성을 보인다. 첫째, 지역에서 필요한 물품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시작된 만큼 기술적으로는 수공업, 사회경제적으로는 가내공업의 형태를 띤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자본의 영세성과 비근대성을 탈피하지 못한 채 근대공업으로부터 압박을 받아왔다. 마지막으로 전통공업 산지에서 핵심적인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상업자본과 지배 및 종속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상호 존립의 기초가 되어왔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을 통해 볼 때, 전통공업은 가내공업의 형태로 인해 근대공업에 압박을 받아왔으며, 단순히 제조업으로 가능한 공업이 아닌 상업자본이 필요한 공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현대로 들어오면서 전통공업에 대하여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점차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세계화, 경제 자치의 목표 아래 지방자치단체들은 지역의 경쟁력 강화가 필수 요소가 되었고 전통문화유산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확대해나갔다. 대량화, 일반화에서 개성적, 특수함으로 시대 선호도가 바뀌기 시작하였고, 전통공업은 지역의 고유성과 특수성을 발전시킴으로써 지역의 경쟁력을 강화해 나갔다. 영주 지역의 전통공업으로 풍기인견이 대표적인 산업이 되었고 관광 마케팅과 지역 경제의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었다. 풍기인견은 근대산업에서 시대적 흐름에 잠깐 도태되는 모습을 보였으나 지자체의 지원 아래 전통공업이라는 하나의 흐름에 편승할 수 있었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서는 풍기인견에 대한 지원 사업을 꾸준히 추진하고 있다. 현재 풍기인견에 대한 사업은 풍기인견명품화사업, 풍기인견 유통 및 판매 지원 사업, 풍기인견 패션쇼 등을 추진하였으며, 이와 같은 다양한 노력으로 풍기인견이 한국의 인견 제품 생산량의 70%를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커질 수 있었다.

[토착민과 월남민 조화의 결과물, 풍기인견]

풍기인견은 월남민들의 기술과 풍기 주민들의 인심이 화합함으로써 이식산업으로서는 대표적으로 성공한 사례이다. 풍기인견은 월남민들에 의해 직조될 수 있었는데, 월남민이 풍기로 들어온 연유에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첫째, 풍기가 십승지의 하나였다는 점, 둘째, 영주 지역에 월남민에 의한 직조공장이 세워져 있었다는 점, 셋째, 직조하기 위한 재료를 얻을 수 있는 산지가 가까운 점 등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특징에도 불구하고 전통공업은 산지와 상업 유통로가 근접해야 하나, 풍기는 유통로가 크게 떨어진 위치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월남민은 생존을 위해 토착민과 떨어진 위치에 자리 잡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월남민의 경우 맨몸으로 월남했기에 땅, 자본 등이 없었을 것이며, 가진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서는 직조공업에 참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한, 땅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새로운 터전을 개척하기 위해 토착민의 경계가 없는 장소에 자리를 잡았을 것이다. 그러한 점으로 볼 때, 풍기는 상업 유통로를 제외한다면 지리적으로 좋은 이점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예상된다.

월남민에 의한 풍기인견의 발전은 토착민의 도움 또는 협조가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월남민에 의해 직조공장이 세워졌으나 현재의 직조기계가 아닌 수공업 중심의 직조방식이었기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월남민에 의해 공장이 지어졌다 하더라도 토착민의 노동력과 허가가 없었다면 직조공장을 유지하기에 어려움이 컸을 가능성이 크다. 직조공장의 부지 또한 토착민과 동업으로 구할 수 있었으며, 토착민에 의해 풍기인견을 제작할 수 있는 노동력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대부분 이식산업은 토착민과의 불화, 상업적으로 미미한 가치, 시대 흐름에 편승하지 못하는 등의 문제로 인해 성공에 어려움이 많다. 그러나 풍기인견은 월남민들이 토착민들과 동업을 하는 등의 화합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며, 인견 기술 또한 독점하지 않고 공유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광복 이후 이주민뿐만 아니라 토착민들도 직물업에 종사하기 시작하였고, 직물업체의 수만 30개가 될 정도로 많이 늘어나는 모습을 통해 화합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한국전쟁 이후 피난민이 대거 풍기로 이주해 오게 되는데, 이들을 받아들여 생계수단으로서 직조기술을 가르치고 활용하는 모습 또한 화합의 정신을 살필 수 있다. 결국, 이러한 화합의 끝에 1950년대 후반 풍기인견은 국내 시장을 석권하고 최대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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