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면 만세시위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355
한자 長壽面萬歲示威運動
영어공식명칭 Independence Movement in Jangsu-myeon
이칭/별칭 장수면 만세운동,장수3.1운동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장수면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영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4월 11일연표보기 - 장수면 만세시위운동 시작
전개 시기/일시 1919년 4월 11일연표보기 - 장수면 만세시위운동 전개
종결 시기/일시 1919년 4월 11일연표보기 - 장수면 만세시위운동 종결
발생|시작 장소 웅곡산 - 경상북도 영주시 장수면 호문리 지도보기
종결 장소 웅곡산 - 경상북도 영주시 장수면 호문리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
관련 인물/단체 손달익|장윤덕|송득용|손용백|황학명

[정의]

1919년 4월 11일 영주의 장수면 호문리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운동.

[개설]

장수면 만세시위운동은 1919년 4월 11일 영주군 장수면 호문리에 있는 청년 손달익(孫達翼)이 호문리 마을 서당에서 같이 공부하는 장윤덕(張潤德)·송득용(宋得龍)·손용백(孫龍伯)·황학명(黃學明) 등과 함께 호문리 마을 앞산으로 올라가서 벌인 만세운동이다. 그러나 호문리를 순찰 중이던 헌병들에게 곧 발각되어 그 자리에서 모두 체포되고 장수면 만세시위운동은 종결되었다.

[역사적 배경]

장수면 만세시위운동은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사조나 일본 도쿄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 등과 같은 국제적 정세와 관계없이, 고종황제의 갑작스러운 죽음, 서울에서 비롯된 전국적인 만세시위운동, 영주면 만세시위운동·풍기면 만세시위운동 등의 영향을 받아 일어났다.

[경과]

장수면 만세시위운동은 1919년 4월 11일 영주군 장수면 호문리 마을 앞산 웅곡산에서 일어났다. 호문리 마을 서당에서 공부하던 청년 중 손달익이 전국 각지의 만세운동 소식과 이웃 마을의 만세운동 소식을 듣고 한국도 곧 독립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자신도 만세시위운동을 일으켜야겠다고 결심하였다. 손달익은 서당에서 함께 공부하는 장윤덕·송득용·손용백·황학명 등에게 만세시위운동을 권유하였고 이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로 뜻을 모았다. 손달익·장윤덕·송득용·손용백·황학명 등은 거사 날짜를 1919년 4월 11일, 장소는 호문리 마을 앞산 웅곡산으로 정하였다.

웅곡산은 나지막하여 접근하기 편리할 뿐만 아니라 바로 앞에 마을길이 있어 농사일하는 사람이나 그곳을 지나는 사람들도 쉽게 잘 보이는 곳이었다. 손달익·장윤덕·송득용·손용백·황학명 등은 1919년 4월 11일 손달익의 주도로 산에 올라갔다. 손익달이 준비해 간 칠판에 혈서로 ‘대한국독립만세’라고 쓰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장윤덕·송득용·손용백·황학명 등도 따라 독립만세를 힘껏 외쳤다. 몇 차례 대한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때마침 호문리 마을을 순찰하던 일본군 헌병과 헌병보조원에게 발각되어 붙잡히면서 장수면 만세시위운동은 종료되고 말았다.

[결과]

장수면 만세시위운동에서 체포된 청년들은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징역 6개월 내지 1년, 또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의의와 평가]

장수면 만세시위운동은 영주 지역 만세운동 가운데 가장 늦게 일어났다. 그렇지만 장수면 만세시위운동을 일으킨 인사들이 마을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있던 젊은 청년이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이들 청년은 인근 지역의 만세운동 소식을 듣고 조국 광복에 대해 꿈을 안고 그들만의 만세운동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특히 주도자 손달익이 ‘대한국독립만세’라는 혈서를 써서 대한 독립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다는 점이 돋보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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