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산김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522
한자 豊山金氏
영어공식명칭 Pungsan Kim Clan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강중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1534년 - 풍산김씨 입향조 김농 출생
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1591년 - 풍산김씨 입향조 김농 사망
본관 풍산김씨 -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입향지 풍산김씨 입향지 - 경상북도 영주시 휴천동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풍산김씨 세거지 - 경상북도 영주시 휴천동|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 오록리지도보기
성씨 시조 김문적
입향 시조 김농

[정의]

김문적을 시조로 하고 김농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영주시의 세거 성씨.

[개설]

풍산김씨(豊山金氏)는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이다. 풍산김씨의 시조는 고려조에서 판상사를 역임한 김문적(金文迪)이다.

[연원]

풍산김씨는 고려조의 명문세족으로 대대로 송도[지금의 개성]에 거주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후, 송도의 사족을 한양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에 따라 8세조인 김자순(金子純)[1367~1421] 대에 이르러 한양 장의동(壯義洞)에 정착했다. 이후 김자순은 백형 병조판서 김자량(金子良)이 조선 초기에 발생했던 왕자의 난에 연루되어 1402년(태종 2) 죽임을 당하자, 그 화를 피해 현재의 안동시 풍산읍 오미동에 내려와 집을 짓고 기거하였다. 이후 풍산김씨는 오미동에 850여 년 세거하며 문과 급제 21명, 무과 급제 30명 등을 배출하였고, 문집 23질, 발간되지 않은 유고 32종에 이를 정도로 번성한 일문과 문풍을 이루었다.

[입향 경위]

풍산김씨가 영천 봉향리(奉香里)에 처음 정착한 것은 김농(金農)[1534~1591] 때였다. 김농은 여러 번 관직에 나오라는 천거가 있었지만, 아버지의 유훈에 따라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만년에 가세가 어려워 관직에 나아가 용궁현감, 장예원사의 등을 역임했다. 김농의 아들 김대현(金大賢)[1553~1602]은 풍산김씨 문중의 중흥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봉향 일대에 풍산김씨의 터전을 구축하였다. 영주 지역에 터전을 잡은 풍산김씨는 문과 10명, 생원·진사 40명을 배출하고 문집 11질을 발간할 정도의 번성한 명문가를 이루었다.

김대현의 아들 8형제 중 김응조(金應祖)[1587~1667]의 후손 김정(金亻+政)[1670~1737]은 풍수지리에 밝아 1696년(숙종 22) 봉화군 물야면 오록리에 터전을 새로이 열었다. 물야면 오록리는 원래 의령여씨와 연안김씨가 살고 있었으나, 풍산김씨가 터전을 잡은 후부터는 점차 풍산김씨의 마을로 변했으며 김영조(金榮祖)[1577~1648], 김창조(金昌組)의 후손들이 함께 이거 하여 번성한 일문을 이루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황]

풍산김씨 김영조, 김창조, 김응조의 후손이 봉화군 물야면 오록리에 세거하고 있다.

[관련 유적]

영주시 하망동유연당(悠然堂)이 있다. 김대현이 1589년(선조 22)에 외가가 있던 영천 봉향리에 건립하였다. 그 후 사례로 옮겨 후손들이 관리하다가 1900년경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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