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609
한자 金大賢
영어공식명칭 Kim Dae-hyeon
이칭/별칭 희지(希之),유연당(悠然堂)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수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53년연표보기 - 김대현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89년 - 김대현 이산서원 원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589년 - 김대현 칠송정 동도회 조직
활동 시기/일시 1595년 - 김대현 성현도찰방 부임
활동 시기/일시 1598년 - 김대현 상의원직장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00년 - 김대현 이산서원 원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601년 - 김대현 산음현감 부임
몰년 시기/일시 1602년연표보기 - 김대현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29년 - 김대현 이조참판 증직
추모 시기/일시 1813년 - 김대현 구호서원 제향
거주|이주지 김대현 거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휴천동 지도보기
부임|활동지 김대현 부임지 -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내림리 지도보기
부임|활동지 김대현 부임지 - 경상북도 청도군
부임|활동지 김대현 부임지 - 경상남도 산청군
묘소|단소 김대현 묘소 - 경상북도 예천군 호명면 직산리
사당|배향지 구호서원 -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동 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풍산(豊山)
대표 관직 성현도찰방|산음현감

[정의]

조선 후기 영주 출신의 문신.

[개설]

김대현(金大賢)[1553~1602]은 성현도찰방·산음현감 등을 지냈다. 영주 이산서원(伊山書院)의 원장을 역임하였으며, 칠송정(七松亭) 동도회(同道會)를 조직하였다.

[가계]

김대현의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희지(希之), 호는 유연당(悠然堂)이다. 아버지는 장예원사의를 지낸 김농(金農)[1534~1591], 어머니는 군자감첨정을 지낸 권일(權鎰)의 딸 숙부인 안동권씨(安東權氏), 할아버지는 훈련원부정을 지낸 김의정(金義貞)[1495~1547], 증조할아버지는 충청도관찰사를 지낸 김양진(金楊震)[1467~1535]이다. 부인은 충의위 이찬금(李纘金)의 딸 증 정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이다. 김대현은 모두 아홉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일찍 세상을 떠난 여덟째 아들 김술조(金述祖)[1595~1611]를 제외한 김봉조(金奉祖)[1572~1630]·김영조(金榮祖)[1577~1648]·김창조(金昌祖)[1581~1637]·김경조(金慶祖)[1583~1645]·김연조(金延祖)[1585~1613]·김응조(金應祖)[1587~1667]·김염조(金念祖)[1589~1652]·김숭조(金崇祖)[1598~1632]가 모두 현달하였다.

[활동 사항]

김대현은 어린 시절 성혼(成渾)[1535~1598]으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며, 1582년(선조 15) 생원시에 급제하였다. 1589년 고향인 영천군(榮川郡) 봉향리(奉香里)[지금의 영주시 휴천동]에 유연당(悠然堂)을 짓고 소요하였다. 또 1589년 이황(李滉)[1501~1570]을 제향한 이산서원[영주시 이산면 내림리]의 원장이 되었다.

김대현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족들과 함께 태백산 아래로 피난하였으며, 향병(鄕兵)을 모아 안집사 김륵(金玏)[1540~1616]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이 무렵 전염병과 굶주림으로 죽는 사람이 많아 조정에서는 각 고을에 진제장(賑濟場) 열어 백성들을 구휼케 했는데, 여러 사람이 기피하였지만 김대현은 직접 나서서 정성껏 소임을 다하였다. 이러한 덕행이 알려져 대신이었던 이덕형(李德馨)[1556~1618]과 이조에 있던 김륵이 여러 차례 김대현을 천거하였다. 이에 1595년 성현도찰방으로 부임하였다. 부임지에서 흩어진 백성들을 모으고 전란으로 쇠락해진 고을을 복구하여, 임기를 마친 후 아전과 군졸들이 공덕비를 세웠다고 한다.

김대현은 1598년 상의원직장에 제수되면서 정유재란 때 파견되었던 명나라 장군 형개(邢玠)의 접대낭청을 겸직하였다. 이때 한양에 머무르며 관직 생활 중이던 경상도 출신의 명현들과 함께 칠송정 동도회를 조직하였다.

김대현은 1599년 예빈시주부에 제수되었지만, 얼마 후 고향으로 돌아왔다. 1600년(선조 33) 다시 이산서원 원장에 올라 선비들에게 『가례(家禮)』와 『소학(小學)』 등을 가르쳤다. 1601년 산음현감으로 부임하였는데, 재임 중 폐허로 변한 문묘를 중건하는 데 힘썼다. 1602년 경상도관찰사 이시발(李時發)[1569~1626]이 김대현의 치적을 보고하였고, 이에 조정에서는 관직을 올리라는 명을 내렸으나, 미처 시행하기 전에 관사(官司)에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김대현의 문집으로 4권 2책의 『유연당집(悠然堂集)』이 전한다. 문집에는 성현도 지역의 피폐함을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1547~1634]에게 보고한 「상도체찰사이(上都體察使李)」, 일본과의 강화를 반대하며 올린 「척화소(斥和疏)」, 전란으로 피폐해진 여러 역의 상황과 개선책에 대해 올린 「청구폐소(請救弊疏)」, 접대낭청으로 있을 때의 기록인 「기군문잡사(記軍門雜事)」 등이 수록되어 있어, 임진왜란 당시의 여러 상황을 살펴보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묘소]

김대현의 묘소는 예천군 호명면 직산리 광석산(廣石山)[대지산(大枝山)]에 있다.

[상훈과 추모]

김대현은 1629년(인조 7) 다섯 아들이 문과에 급제했다고 하여, 인조의 지시로 사제(賜祭)하고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1813년(순조 13) 지역 사림의 공의로 권두문(權斗文)[1543~1617]·김봉조·권창진(權昌震)[1597~1683]과 함께 구호서원(鷗湖書院)에 추향되었다. 구호서원은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철폐된 후 지금까지 복설되지 않았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