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612
한자 金應祖
영어공식명칭 Kim Eung-jo
이칭/별칭 효징(孝徵),학사(鶴沙),아헌(啞軒)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수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87년연표보기 - 김응조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13년 - 김응조 생원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24년 - 김응조 알성시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31년 - 김응조 흥덕현감 부임
활동 시기/일시 1633년 - 김응조 선산도호부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636년 - 김응조 남한산성 호종
활동 시기/일시 1640년 - 김응조 인동도호부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641년 - 김응조 학사정 건립
활동 시기/일시 1643년 - 김응조 홍무관부수찬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44년 - 김응조 구로회 결성
활동 시기/일시 1649년 - 김응조 홍문관응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51년 - 김응조 사간원사간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51년 - 김응조 밀양도호부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653년 - 김응조 담양도호부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656년 - 김응조 예조참의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67년 - 김응조 한성부우윤 제수
몰년 시기/일시 1667년연표보기 - 김응조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70년 - 김응조 물계서원 제향
추모 시기/일시 1679년 - 김응조 의산서원 제향
출생지 김응조 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시 휴천동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김응조 거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휴천동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김응조 거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 조제리 지도보기
부임|활동지 김응조 부임지 -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부임|활동지 김응조 부임지 -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부임|활동지 김응조 부임지 - 경상북도 구미시
부임|활동지 김응조 부임지 - 경상남도 밀양시
부임|활동지 김응조 부임지 - 전라남도 담양군
묘소|단소 김응조 묘소 - 경상북도 안동시 북후면 석탑리
사당|배향지 물계서원 - 경상북도 예천군 감천면 관현리
사당|배향지 의산서원 - 경상북도 영주시 장수면 성곡리 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풍산(豊山)
대표 관직 선산도호부사|사간원사간|홍문관응교|한성부우윤

[정의]

조선 후기 영주 출신의 문신.

[개설]

김응조(金應祖)[1587~1667]는 선산도호부사·사간원사간·홍문관응교·한성부우윤 등을 지낸 문신이다.

[가계]

김응조의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효징(孝徵), 호는 학사(鶴沙)·아헌(啞軒)이다. 아버지는 산음현감을 지낸 김대현(金大賢)[1553~1602], 어머니는 충의위 이찬금(李纘金)의 딸 증 정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 할아버지는 장예원사의를 지낸 김농(金農)[1534~1591], 증조할아버지는 훈련원부정을 지낸 김의정(金義貞)[1495~1547]이다. 부인은 종사랑 김굉(金浤)의 딸이자 문충공 김성일(金誠一)[1538~1593]의 손녀인 정부인 의성김씨(義城金氏)이다.

김응조는 아홉 형제 가운데 여섯째이다. 일찍 세상을 떠난 여덟째 김술조(金述祖)[1595~1611]를 제외하고, 김봉조(金奉祖)[1572~1630]·김영조(金榮祖)[1577~1648]·김창조(金昌祖)[1581~1637]·김경조(金慶祖)[1583~1645]·김연조(金延祖)[1585~1613]·김응조·김염조(金念祖)[1589~1652]·김숭조(金崇祖)[1598~1632]가 모두 현달하였다. 여덟 명이 사마시에 급제하고, 다섯 명이 문과에 급제하였기에 인조는 이들 형제를 ‘팔련오계지미(八蓮五桂之美)’라고 불렀다.

[활동 사항]

김응조는 1587년(선조 20) 경상도 영천군 봉향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 권호신(權虎臣)[1558~1629]과 권두문(權斗文)[1534~1617]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성장해서는 형 김연조와 함께 류성룡(柳成龍)[1542~1607]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1612년(광해군 4) 영천군 갈산(葛山)[지금의 영주시 장수면 갈산리]으로 이주해 삼허당(三虛堂)을 세웠다. 1613년 생원시에 급제하였으나, 대북 세력 주도의 극단적인 정국 운영이 지속되자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또 같은 고을에서 대북을 따르는 자들과 절교하였고, 다른 경상도 유생들과 함께 이이첨(李爾瞻)[1560~1623]을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다.

김응조는 장현광(張顯光)[1554~1637]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물러나자 알성시 문과에 응시해 급제한 뒤 본격적인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631년(인조 9) 흥덕현감으로 부임하였는데, 1632년 관직을 버리고 돌아갈 때 고을 백성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세우려고 했으나, 김응조가 만류하여 대신 공덕비를 세웠다. 1633년 선산도호부사로 부임하였으며, 1635년 사헌부지평과 사헌부장령에 제수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남한산성까지 호종하였다. 1637년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자 관직을 버리고 영천군 갈산으로 돌아왔다. 얼마 후 가도(椵島)가 청나라에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애가도(哀椵島)」라는 시를 지었다.

김응조는 1640년(인조 18) 인동도호부사로 부임하여, 스승 장현광의 사당을 짓고 문집을 간행하였다. 1641년에는 영천군 멱실[지금의 영주시 문수면 조제리 일대]에 학사정(鶴沙亭)을 짓고, 여러 인사와 교유하는 장소로 삼았다. 1644년에는 고향의 원로들과 함께 구로회(九老會)를 결성하였으며, 이후 시강원보덕·홍문관부교리·사헌부집의·성균관직강 등에 제수되었다.

김응조는 1649년(효종 즉위년) 사간원사간에 오르자, 효종에게 학문에 힘쓰고 언로를 넓힐 것을 청원하는 상소를 올렸다. 또 강빈(姜嬪)의 옥사사건(獄事事件)으로 상소를 올렸다가 투옥된 김홍욱(金弘郁)[1602~1654]을 구원하였지만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 1649년 홍문관응교에 오른 뒤에는 상소를 올려 유배되어 있던 심대부(沈大孚)[1586~1657]와 유계(兪棨)[1607~1664]의 구원을 청원하였다. 심대부와 유계는 효종이 아버지 인조에게 ‘조(祖)’라는 묘호를 사용하려 하자, 반대 의견을 올렸다가 효종의 노여움을 사 유배된 상태였다. 1651년 사간원사간으로 있으면서 삼분모미회록법(三分耗米會錄法)의 혁파를 진계(陳啓)하였다. 삼분모미회록법은 1637년 이후 청나라 사신의 접대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각도 모곡(耗穀)의 10분의 3을 징수하는 것인데, 그 과정에서 폐단이 많이 발생하여 혁파를 건의하였다. 1637년 승정원동부승지을 거쳐 밀양도호부사로 부임하였으며, 1653년에는 담양도호부사에 임명되었다.

김응조는 1656년(효종 7) 예조참의에 제수되었는데 효종에게 백성을 사랑하고 학문 숭상을 청원하는 상소를 올렸다. 또 몇 달 후에는 경상도 속오군(束伍軍)에 대한 보인 지급의 폐단과 장사(杖死)된 김홍욱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렸다. 1659년 공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1659년(현종 즉위) 효종이 승하하자 만사를 지어 올린 후 고향으로 돌아왔다. 1664년(현종 5) 담양도호부사 시절 금성산성 군량미의 질이 저하된 이유로 고신(告身)을 빼앗겼다. 1667년(현종 8) 한성부우윤에 제수되었으나 상소를 올리고 사직하였다. 1667년 세상을 떠나자, 현종이 예조정랑 권적(權迪)을 보내 치제하였다.

[학문과 저술]

김응조의 문집으로 11권 6책의 『학사집(鶴沙集)』이 전한다. 문집에는 관직에 있으면서 국왕에게 올린 각종 상소와 예학과 관련된 여러 편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묘소]

김응조의 묘소는 안동시 북후면 석탑리 학가산(鶴駕山)에 있다.

[상훈과 추모]

김응조는 1670년(현종 11) 물계서원(勿溪書院)[예천군 감천면 관현리], 1679년(숙종 5) 의산서원(義山書院)[영주시 장수면 성곡리]에 제향되었는데, 두 서원 모두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철폐되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