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759
한자 金華鎭
영어공식명칭 Kim Hwa-jin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4년 10월 17일연표보기 - 김화진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22년 3월 - 김화진 영주공립보통학교 4학년 수료
활동 시기/일시 1928년 2월 - 김화진 영주청년동맹 가입
활동 시기/일시 1928년 2월 - 김화진 신간회 영주지회 가입
활동 시기/일시 1929년 3월 - 김화진 영주농민조합 검사위원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32년 4월 - 김화진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 조직
몰년 시기/일시 1946년 12월 22일연표보기 - 김화진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5년연표보기 - 김화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김화진 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김화진 거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 지도보기
학교|수학지 영주공립보통학교 - 경상북도 영주시
활동지 김화진 활동지 - 경상북도 영주시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 활동

[정의]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김화진(金華鎭)[1904~1946]은 1920년대 후반 영주 지역에서 영주청년동맹·신간회 영주지회·영주농민조합에서 활동하였으며, 1932년에는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 결성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운동가이다.

[가계]

김화진은 1904년 10월 17일 지금의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에서 출생하였다.

[활동 사항]

김화진은 1922년 3월 영주공립보통학교 4학년을 수료하였으며, 1924년 5월 일본 도쿄[東京]로 건너가 고무공장에서 노동자 생활을 하였다. 1928년 2월 귀향하여 농업에 종사하기 시작했는데, 귀향 다음 날 영주청년동맹신간회 영주지회에 가입하였다.

1927년 11월 24일 조선청년총동맹의 부군청년동맹 결성 방침에 따라 영주청년회풍기청년회가 합쳐져 영주청년동맹이 결성되었고, 김화진도 여기에 참여하였다. 1929년 김화진영주청년동맹 집행위원 김계등(金季登)[1907~?]과 함께 순흥청년회 해체 활동을 전개하였다. 영주청년동맹 창립 이후 순흥 등 각 면에 지부를 설치하였는데, 해산되어야 할 순흥청년회가 해산하지 않고 영주청년동맹의 활동 방침과 다른 성향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그런 가운데 김화진김계등과 순흥청년회 총무 차병섭(車秉燮)을 만나 해산을 압박하였다. 이로 인해 1930년 9월 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죄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언도받았다.

김화진은 1929년 1월 15일 개최된 신간회 영주지회 정기대회에서 대표회원으로 선임되었다. 1929년 7월 30일 열린 신간회 영주지회 임시대회에서는 집행위원 겸 대표회원으로 선정되었다. 1929년 영주 지역에서 한해(旱害)가 발생하자, 구제연설회가 결성되었는데, 이때 김화진은 서대(西隊)에 편성되어 영주군 풍기면와 순흥면을 맡았다. 1929년 6월 신간회 영주지회가 영주 읍내에서 과자 행상을 통해 운영비를 마련할 때, 평은면문수면을 대상으로 한 제3대에 편성되었다. 1929년 3월 풍기농우동맹이 해산되고 영주농민조합이 결성될 때 김화진은 검사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영주농민조합은 금계와 이산에 지부를 설치하고, 단일 농민조직 체계를 갖추어 나가면서 2,352명의 조합원을 확보하였다.

김화진은 1931년 9월 김봉호(金鳳鎬)[1884~1950]·김계등·박병성(朴炳星)[1904~?]·정규찬 등과 함께 농민운동과 반제동맹을 전개하기 위한 비밀결사를 조직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1932년 4월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를 조직에 참여하였으며, 김화진김계등·김준상(金俊相)[1910~?]과 함께 혁명적농민조합 조직을 맡았다.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가 조직하려는 혁명적농민조합의 목적은 노동자·농민에 의한 독재 정부 수립에 있었다. 그런 가운데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는 이를 일본 제국주의 몰락의 시작으로 확신하면서, ‘출병 반대’, ‘제국주의 전쟁 반대’, ‘소비에트 러시아 사수’, ‘중국혁명 지지’ 등을 강조해 나갔다.

1932년 7월경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의 활동을 예의주시하던 경상북도경찰부 고등과 형사와 영주경찰서 및 봉화경찰서 경찰에 의해 김화진 등 100여 명이 검거되었다. 1933년 12월 2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언도받고,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상훈과 추모]

김화진은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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