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978
한자 順興鄕校
영어공식명칭 Sunheung Local Confucian School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청구길 15-36[청구리 437]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백지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훼철|철거 시기/일시 1457년연표보기 - 순흥향교 혁파
관련 사항 시기/일시 1683년연표보기 - 순흥향교 순흥도호부 복설로 재창건
개축|증축 시기/일시 1685년 - 순흥향교 대성전·전사청·명륜당·동·서재 완성
이전 시기/일시 1718년 - 순흥향교 순흥도호부 금성리에서 순흥도호부 위야동으로 이건
이전 시기/일시 1750년 - 순흥향교 순흥도호부 위야동에서 순흥도호부 대평면 석교리로 이건
이전 시기/일시 1790년 - 순흥향교 순흥도호부 태평면 석교리에서 순흥면 청구리로 이건
개축|증축 시기/일시 1971년 - 순흥향교 중수
개축|증축 시기/일시 1975년 - 순흥향교 보수
문화재 지정 일시 1998년 4월 13일연표보기 - 순흥향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47호 지정
개축|증축 시기/일시 2000년 - 순흥향교 단청
개축|증축 시기/일시 2001년 - 순흥향교 중수 및 중건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순흥향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재지정
현 소재지 순흥향교 -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청구길 15-36[청구리 437]지도보기
원소재지 순흥향교 -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지도보기
성격 향교|공립교육기관
양식 겹처마 맞배지붕[대성전]|홑처마 맞배지붕[동·서무]|홑처마 맞배지붕[내삼문]|겹처마 팔작지붕[명륜당]|팔작지붕[동재]|홑처마 맞배지붕[영귀루]
정면 칸수 3칸[대성전]|3칸[동·서무]|1[내삼문]|4칸[명륜당]|2칸[동재]|5칸[영귀루]
측면 칸수 4칸[대성전]|0.5칸[동·서무]|1칸[내삼문]|2칸[명륜당]|2칸[동재]|2칸[영귀루]
소유자 경상북도향교재단
관리자 경상북도향교재단
문화재 지정 번호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정의]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청구리에 있는 조선시대 공립교육기관.

[개설]

순흥향교(順興鄕校)는 조선시대 순흥 지역 유생들이 머물며 학문을 닦고, 공자를 비롯한 선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향사를 지내는 제향의 공간이었다. 순흥 지역의 재지사족들은 이곳을 중심으로 향론을 형성하며 향촌 자치 기구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16세기 이후 순흥향교 운영상의 어려움과 사회·경제적 변화 속에 교육 기능은 약화하고, 제향 기능만 남게 되었다.

[위치]

순흥면행정복지센터에서 지방도제931호선을 따라 북쪽으로 1.4㎞ 이동하면 제월교가 나타난다. 제월교를 통해 죽계천을 건너자마자 서쪽 도로로 600m가량 이동하면 순흥향교가 자리 잡고 있다. 순흥향교 동남쪽에는 영주 소수서원이 있다.

[변천]

『교궁대관(校宮大觀)』에 따르면 순흥향교는 1304년(충렬왕 30) 순흥도호부의 북쪽 금성리(金城里)[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교궁대관(校宮大觀)』 기록으로 보아 순흥 지역에는 늦어도 고려 후기에는 향교가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1457년(세조 3) 금성대군(錦城大君)단종복위운동이 실패하면서, 순흥도호부는 폐부 되었으며, 순흥향교도 함께 혁파되었다. 훗날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李滉)[1501~1570]은 혁파된 순흥향교 터를 보고 ‘과순흥향교구지 유지필봉연묵지(過順興鄕校舊址有紙筆峯硯墨池)[순흥향교 옛터를 지나며, 지필봉과 연묵지가 있다]’라는 시를 통해 다음과 같이 안타까워하였다.

소조리락수가촌(蕭條籬落數家村)[쓸쓸하게 흩어진 몇몇 인가들]

계견상마주엄문(雞犬桑麻晝掩門)[닫힌 문에 삼밭에 뛰노는 닭과 개]

지필봉전지수학(紙筆峯前池水涸)[지필봉 아래 세연지 못 물 말랐으니]

당시현송갱수론(當時絃誦更誰論)[당시의 그 현가지송을 뉘와 논하리]

1681년(숙종 7) 폐서인으로 되었던 단종노산대군(魯山大君)으로 복위된 것에 맞추어 1683년 순흥도호부에 대한 복설이 이루어졌고, 순흥향교도 복설 되었다. 순흥향교에 전하는 『교중잡록(校中雜錄)』에 따르면, 1683년 새롭게 파견된 순흥도호부사는 부임하자마자 순흥향교 재창건을 추진했다고 한다. 순흥향교순흥도호부의 북쪽 금성에 대성전 터를 잡았으며, 1684년 2월 역사를 시작하여 1685년 8월에 대성전 9칸, 전사청 3칸, 명륜당 12칸, 동·서재 각 6칸 등이 완성되었다.

하지만 습한 곳에 자리 잡아 완성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건물이 허물어지게 되었다. 이에 1718년(숙종 44) 순흥도호부의 남쪽 5리 위야동(渭野洞)으로 이건하였다. 1724년(경종 4) 대성전을 중수하고, 1750년(영조 26) 다시 순흥도호부 대평면 석교리(石橋里)로 이건하였다가, 1790년(정조 14) 현재 위치로 이건하였다. 1914년 순흥군영주군에 병합되면서, 순흥향교가 훼철될 위기에 처하였지만, 순흥 지역 유림의 반대로 존속할 수 있었다. 해방 이후 향교 보존을 위한 중수 및 보수가 지속하고 있다.

[형태]

순흥향교는 대성전·동무·서무·신문·명륜당·동재·서재·영귀루·교직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순흥향교 전면의 영귀루를 지나면 강학 공간인 명륜당과 동재가 있고, 명륜당 뒤로 제향 공간인 대성전과 동·서무가 있다.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지만, 대성전과 명륜당의 축이 조금 어긋나 있다.

영귀루는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 중층 누각 건물이다. 영귀루를 지나면 정면에 명륜당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동재가 있다. 명륜당은 정면 4칸, 측면 3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평면 중앙 2칸을 협간보다 1척 정도 좁게 하여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협간은 전후 통간 온돌방으로 정면 반칸을 툇마루로 구성하였다. 앞면에 쌍여닫이 궁널띠살문을 두 군데에 설치하고, 툇마루로 통하는 부분도 외짝 여닫이문을 달았다. 뒷면은 모두 두 짝 여닫이문을 내고 있다. 실 정면은 쌍여닫이 띠살문을 달고 대청과 면하는 부분도 칸마다 외여닫이문을 달아 놓았다. 동재는 정면 2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제향 공간의 주 출입문인 내삼문은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내삼문을 통과하면 중앙에 대성전을 중심으로 양쪽에 동·서무가 있다.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 규모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기단은 막돌 위에 주좌를 가진 사각형·원형·팔각형·연화문 초서 등을 함께 썼고, 두리기둥을 세웠다. 건물 벽은 모두 판벽으로 처리하고 내부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다. 앞면 어간에는 두 짝 여닫이 세살문을 달고 좌우 협간에는 어칸 기둥 쪽에 붙여 외짝 세살문을 두었다. 벽체는 창방 이하 판벽으로 두고 창방 이상은 심벽을 구성하였다. 동·서무는 각각 정면 3칸, 측면 반 칸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이 밖에 교직사와 화장실·협문 등이 있다. 교직사는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ㄷ’자형 살림집이다.

[현황]

순흥향교는 장의가 두 사람씩 번을 정하여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 분향하며, 2009년부터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에 춘추향사를 지내고 있다. 순흥향교는 1998년 4월 13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47호로 지정[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어 보호 및 관리되고 있다.

한편, 순흥향교에는 조선 후기 향교 운영 과정에서 작성된 「집사안(執事案)」, 「면분류원임안(面分類原任案)」, 「임사안(任仕案)」, 「죽계아연방수임금안(竹溪亞椽房首任錦案)」, 「교중잡록(校中雜錄)」, 「향교잡록(鄕校雜錄)」, 「의원완의(醫院完議)」, 「교기면부세별초(校基免賦稅別抄)」 등 성책류 자료가 소장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순흥향교는 우리나라 성리학의 요람이라 불리는 영주 지역에서 영주 소수서원(榮州紹修書院), 영주 금성대군 신단(榮州錦城大君神壇)과 더불어 삼소(三所)라고 불릴 만큼,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또한, 조선시대 순흥도호부의 흥망성쇠와 그 궤를 같이한다는 점에서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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