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운조사와 희방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1230
한자 杜雲祖師-喜方寺
영어공식명칭 Duunjosa and Huibangsa Temple(Folktale)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수철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다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수록|간행 시기/일시 2010년 - 「두운조사와 희방사」 『영주시사』2에 「두운조사와 희방사」로 수록
관련 지명 희방사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죽령로1720번길 278[수철리 313-3]지도보기
관련 지명 유석사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죽령로1360번길 289[창락리 280-18]지도보기
관련 지명 수철교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지도보기
관련 지명 도솔봉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지도보기
성격 설화|전설
주요 등장 인물 조사|암호랑이|처녀|유석
모티프 유형 창사

[정의]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수철리에 있는 희방사 창건에 관한 이야기.

[개설]

「두운조사와 희방사」희방사의 창건설화로, 승려 두운(杜雲)이 643년(선덕여왕 12)에 희방사를 창건했다는 내용이다. 비슷한 창건설화가 『희방사유지(喜方寺遺誌)』에도 수록되어 있는데, 두운이 생존했던 시기는 9세기 무렵이어서, 설화의 시대적 배경과 맞지 않는다. 희방사의 실제 창건 시기는 9세기 무렵으로 추정하고 있다.

[채록/수집 상황]

「두운조사와 희방사」는 2010년 영주시사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영주시사』2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신라 선덕여왕 때 두운조사는 태백산 심원암(深源庵)이란 암자에서 수도하다가 희방사가 있는 소백산으로 옮겨 초막을 짓고 수도를 계속하였다. 어느 눈보라 치는 겨울날, 수도에 매진하고 있는 두운조사 앞에 암호랑이 한 마리가 찾아와 괴로워했다. 조사가 자세히 살펴보니 출산이 임박한 것이었다. 이에 두운조사는 부엌에 검불을 깔아 주니 호랑이는 두 마리의 새끼를 낳았다. 그 후 두운조사는 그들을 알뜰히 챙겨주었다. 초봄이 되고 눈이 녹자, 암호랑이는 새끼들을 데리고 초막을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문밖에 기척이 나 두운조사가 문을 열어 보았다. 암호랑이가 피를 흘리며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것이었다. 두운조사는 암호랑이의 입을 벌리자 목구멍에 큰 은비녀가 걸려 있었다. 두운조사는 사람을 잡아먹은 암호랑이를 크게 꾸짖은 뒤,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며칠 후 문밖에 다시 소리가 들려 문을 열어보니 암호랑이가 큰 산돼지 한 마리를 갖다 놓고 두운조사에게 입은 은혜에 보답하려는 듯이 있었다. 두운조사는 암호랑이에게 “내가 술과 고기를 금하는 것을 너도 잘 알고 있으면서 어찌 이런 부정한 물건을 가져왔느냐? 이런 짓을 하려면 두 번 다시 찾아오지 말거라!”라고 야단을 쳤다.

다시 며칠이 지난 어느 밤, 암호랑이가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조사가 문을 열자 암호랑이가 조사의 장삼을 물고 당겼다. 조사는 암호랑이가 가는 데로 따라가 보니, 앞산 큰 바위 밑에 혼수상태에 빠진 한 처녀가 누워 있었다. 조사는 급히 처녀를 업고 초막으로 가서 물을 끓여 먹이고 정신을 차리게 한 후 처녀에게 내막을 물었다. “저는 경주 계림에 사는 호장(戶長) 유석(兪碩)의 무남독녀로 오늘 결혼식을 치른 후 저녁에 막 신방에 들어가려는 찰나, 불덩이 같은 것이 몸에 부딪히더니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것을 느낀 후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두운조사는 처녀에게 “여기서 경주는 4백 리가 넘는데 비호(飛虎)라는 말이 거짓이 아니로구나. 너희 집에서 얼마나 걱정이 많겠느냐! 며칠 쉬었다가 곧 돌아가거라.”라고 말했다. 그 뒤 두운조사는 처녀에게 남자의 의복을 입혀 총각처럼 꾸며 경주로 데리고 갔다.

한편, 딸을 잃은 유석은 며칠을 두고 찾아다녔으나 찾지 못했고, 온 집안이 초상집 같았다. 딸이 돌아오자 자초지종을 들은 유석이 두운조사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면서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죄송하오나 조사님은 딸의 죽은 목숨을 살려 주신 은인이니 불민한 것이오나 거두어 인연을 맺게 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두운조사는 “나는 이미 세속과 인연을 끊고 산중에 들어가 수도하는 몸이요. 이미 따님과는 남매의 인연을 맺었으니 그런 당치도 않는 말씀은 삼가시오.”라고 하며 완강히 거절했다. 유석은 두운조사의 수도 생활을 듣고 조사에게 큰 절을 지어주기로 결심했다. 유석이 두운조사에게 “이곳은 신라의 훌륭한 문화의 자취와 고적이 많이 있습니다. 3개월 정도 이곳에 머무르며 조용히 순례해주십시오.”라고 간청했다.

2~3개월이 지난 화장한 봄날 유석과 두운조사는 나귀를 타고 길을 떠났다. 풍기에서 소백산 연화봉으로 가는 길은 새로 닦아 큰 길이 되었고, 동구 앞 여울에는 쇠다리가 놓였다. 그뿐만 아니라 두운조사가 살던 초막 자리에는 초막은 사라지고 큰 법당이 즐비하게 들어섰다. 그제야 유석은 두운조사에게 자신이 사람을 보내 3개월 동안 절을 지어 놓았다고 알려주었다. 그리고는 “조사님은 전 가족에게 기쁨을 주었기에 절 이름을 ‘희방사(喜方寺)’라고 지었고, 저 아래 다리는 ‘수철교(水鐵橋)’, 풍기 서문 밖에 놓은 다리는 ‘유다리’라고 이름하였습니다.”라고 일러주었다. 또 유석은 두운조사와 인연을 길이 기념하기 위해 도솔봉 아래 유석사(兪碩寺)라는 조그마한 암자를 지었으며, 토지 백여 두락(斗落)을 사서 공양미를 드렸다.

[모티프 분석]

「두운조사와 희방사」의 주요 모티프는 ‘창사(創寺)’이다. 평소 열심히 수행에 매진하고 불쌍한 생물을 거두어준 두운조사는 경주호장의 무남독녀를 구해줌으로써 큰 절을 희사 받는다. 전승자들은 이 이야기를 통해 고승인 두운조사가 머물렀던 곳인 영주시 풍기읍 수철리희방사를 떠올리며, 자긍심을 고취하고자 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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