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575
한자 千熙
영어공식명칭 Cheonhui
이칭/별칭 설산(雪山),진각(眞覺),대각원조(大覺圓照),원응(圓應),부석국사(浮石國師)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종교인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위은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307년연표보기 - 천희 출생
출가|서품 시기/일시 1319년 - 천희 출가
활동 시기/일시 1325년 - 천희 승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367년 - 천희 국사 책봉
활동 시기/일시 1372년 - 천희 부석사 주지 임명
몰년 시기/일시 1382년 - 천희 입적
추모 시기/일시 1382년 - 천희 증시
추모 시기/일시 1386년 - 창성사 진각국사 대각원조탑비 건립
출생지 천희 출생지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읍
학교|수학지 부석사 -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로 345[북지리 157]지도보기
학교|수학지 창성사 -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 13-1
성격 승려
성별
대표 경력 국사|부석사 주지

[정의]

고려 후기 영주의 부석사에서 주지를 지낸 승려.

[개설]

천희(千熙)[1307~1382]의 호는 설산(雪山), 존호는 원응(圓應), 시호는 진각(眞覺), 탑호는 대각원조(大覺圓照), 법명은 천희이다. 천희는 경상도 흥해군의 향리 가문 출신이며, 속성은 배씨(裵氏)라는 설이 있으나 명확하지 않다. 어머니는 최씨(崔氏)이다. 공민왕에 의해 국사(國師)로 책봉되었는데, ‘부석국사(浮石國師)’라는 별호가 있을 정도로 부석사 중창에 심혈을 기울였다.

[활동 사항]

천희는 1319년(충숙왕 6) 화엄종 반룡사(盤龍寺) 주지였던 일비(一非)의 문하로 출가하였다. 1325년(충숙왕 12) 승과의 상품에 급제한 후 김생사(金生寺), 부인사(符仁寺), 덕천사(德泉寺), 개태사(開泰寺) 등 10여 곳 사찰의 주지를 역임하였다.

화엄종 승려였던 천희는 선법(禪法)에도 관심이 많아, 1364년(공민왕 13) 58세의 늦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선풍 진작에 큰 영향을 주었던 원나라 승려 몽산덕이(蒙山德異)의 간화선법을 배우기 위해, 중국 항저우[杭州]의 휴휴암(休休庵)을 찾았다. 몽산덕이는 이미 입적한 후였지만, 천희는 다른 사람들이 풀지 못한 몽산덕이의 삼전어(三轉語)를 해석하였다. 몽산덕이가 후계자를 위해 남겨놓은 물건들을 찾아냄으로써, 자신이 정통 후계자임을 과시하였다. 1366년에는 중국 쑤저우[蘇州]의 성안사(聖安寺)에 주석하고 있던 만봉시울(萬峯時蔚)을 만나, 만봉시울의 인가를 받았다.

고려로 돌아온 천희는 치악산에 잠시 은거하였으며, 이후 양양의 낙산사에서 관세음보살이 방광(放光) 하는 상서를 감득하게 된다. 1367년 국사로 추대되어 ‘대화엄종사 선교도총섭 전불심인 대지무애 성상원통 복□□□□□□□□□□ 원응존자(大華嚴宗禪敎都摠攝傳佛心印大智無碍性相圓通福□□□□□□□□□□圓應尊者)’라는 존호를 받았다. 또 국사부(國師府)를 설치하고 관원을 두었으며, 인장과 법복을 하사받았다. 이렇게 늦은 나이에 원나라로 건너가서 선법을 배우고 국사에 추대될 수 있었던 것은 신돈(辛旽)[?~1371]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천희는 1370년 왕사 나옹(懶翁)[1320~1376]을 청하여 개성 광명사(廣明寺)에서 선교 양종의 승려들을 모아 공부선(功夫選)을 치를 때 증명법사(證明法師)로 참여하였다. 이 선과법회가 끝난 후 경천사(敬天寺)에 주석하였다. 1371년 7월 신돈이 제거되자, 천희도 국사에서 물러났다.

천희는 1372년(공민왕 21)부터 부석사의 주지로 주석하였다. 천희는 자신이 입적하기 전 화엄종의 총본산인 부석사를 완전히 복구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실제 주지로 있으면서 무량수전을 비롯하여 부석사의 퇴락한 전당을 크게 중건하였다. 이 때문에 세간에서는 천희를 ‘부석국사’로 불렀다. 만년에 수원 광교산 창성사(彰聖寺)에 주석하였으며, 창성사에서 입적하였다.

[상훈과 추모]

천희의 고향인 경상도 흥해군은 경주의 속군(屬郡)이었는데, 공민왕 연간 천희가 국사로 봉해지자 지군사로 승격되었다. 입적 후 우왕이 ‘진각국사(眞覺國師)’라는 시호와 ‘대각원조(大覺圓照)’라는 탑호를 내렸다. 우왕의 명으로 1386년(우왕 12) 수원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水原彰聖寺址眞覺國師塔碑)[보물 제14호]가 세워졌는데, 이색(李穡)[1328~1396]이 비명을 쓰고, 비구 혜잠(惠岑)이 비문을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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