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6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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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始鑌 |
영어공식명칭 | Kim Si-bin |
이칭/별칭 | 휴백(休伯),백남(白南)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수환 |
[정의]
조선 후기 영주 출신의 문신.
[개설]
김시빈(金始鑌)[1684~1729]은 예조정랑·거창현감·울산부사 등을 지낸 문신이다. 영조 즉위 초 김일경(金一鏡)[1662~1724]이 신임옥사(辛壬獄事) 때 쓴 토역반교문(討逆頒敎文)의 개찬(改撰)을 청원하였다.
[가계]
김시빈의 본관은 함창(咸昌), 자는 휴백(休伯), 호는 백남(白南)이다. 아버지는 통덕랑 김정휘(金鼎輝), 어머니는 성균관사예 이상언(李尙彦)[1597~1666]의 딸 공인 경주이씨(慶州李氏), 할아버지는 통사랑 김요필(金堯弼), 증조할아버지는 김기추(金起秋)이다. 부인은 금필화(琴必華)의 딸 숙인 봉화금씨(奉化琴氏)와 감역을 지낸 이명(李溟)의 딸 숙인 연안이씨(延安李氏)이다.
[활동 사항]
김시빈은 1702년(숙종 28) 형 김시화(金始鏵)[1662~1732]와 함께 사마시에 급제하였으며, 1702년 겨울 별시 문과에도 급제하였다. 이후 성균관전적·예조좌랑·강원도도사·신창현감 등에 제수되었으며, 1709년에는 황장목경차관으로 강원도에 파견되었는데, 이때 지은 시를 모아 『관동록(關東錄)』으로 엮었다. 1712년(숙종 38)에는 재상경차관(災傷敬差官)으로 경상도에 파견되었다. 이때 김시빈은 몸소 경상도 여러 고을의 전답을 확인하고 재해 상황을 보고하였으며, 장계를 올려 예안현감의 탐학을 보고하였다. 1713년 인경왕후(仁敬王后)[1661~1680]·인현왕후(仁顯王后)[1667~1701]·인원왕후(仁元王后)[1687~1757]의 존호를 올리기 위해 존숭도감이 설치되었는데, 김시빈이 존숭도감의 낭청으로 있으면서 숙종으로부터 10첩의 병풍을 하사받았다. 1715년 거창현감으로 부임하였다. 마침 거창현에 흉년이 들어 고을 백성들이 흩어지고 있었는데 개인재산을 털어 백성들을 구휼하였으며, 기근이 지속되자 목욕재계 뒤 친히 기우제를 거행하니 곧 큰비가 내렸다고 한다. 또 고을에서 전횡을 일삼던 토호들을 처벌하였고, 고을의 문풍을 크게 진작시키는 등 여러 치적을 남겼다.
김시빈은 1722년(경종 2) 전라도도사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1723년에는 시강원필선에 제수되었지만 사은하고 돌아왔다. 1724년 영조 즉위 직후 사헌부장령에 제수되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신임옥사가 재론되고 있었다. 남인이었던 김시빈은 상소문을 올려 신임옥사 때 소론 김일경이 대찬(代撰)했던 토역반교문의 개찬 등을 건의하는 등 정치적 파장을 일으켜 외직인 명천부사로 나아가게 되었다. 또 비슷한 시기 같은 영천군(榮川郡) 출신으로 영조 초 경상도 인사들의 등용을 건의하였던 나학천(羅學川)[1658~1731]과의 갈등도 발생하여, 여러 신하로부터 탄핵을 받아 1725년 삭직되어 한동안 죽산에 우거하였다.
1728년(영조 4) 영조는 김시빈을 서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얼마 후 소론이었던 이인좌(李麟佐)[?~1728]가 난을 일으켰고, 경상도의 남인 중에도 참여한 자들이 있었기에, 노론 당국자들은 경상도 사람들을 역당으로 지목하였다. 이에 김시빈은 경상도의 다른 선비들과 연명 상소를 올려 역당이라는 지목을 변론하였다. 1728년 3월 이인좌의 난으로 경상도의 민심이 흉흉해지자 영조는 김시빈을 울산부사로 임명하였다. 1729년 임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김시빈의 문집으로 6권 3책 『백남집(白南集)』이 전한다.
[묘소]
김시빈의 묘소는 봉화군 봉화읍 적덕리 두릉(杜稜)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