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6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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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九鼎 |
영어공식명칭 | Kim Gu-jeong |
이칭/별칭 | 경진(景鎭),서현(西峴)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수환 |
출생 시기/일시 | 1550년 - 김구정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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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73년 - 김구정 생원시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82년 - 김구정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82년 - 김구정 경주훈도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92년 - 김구정 영해도호부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594년 - 김구정 접반관 차출 |
활동 시기/일시 | 1596년 - 김구정 종묘서령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97년 - 김구정 경상도도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604년 - 김구정 호성원종공신 1등 녹훈 |
활동 시기/일시 | 1608년 - 김구정 의성현령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610년 - 김구정 정선군수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612년 - 김구정 대구도호부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629년 - 김구정 통정대부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30년 - 김구정 가선대부 용양위부호군 제수 |
몰년 시기/일시 | 1638년 - 김구정 사망 |
거주|이주지 | 김구정 거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단산면 사천리 |
부임|활동지 | 김구정 부임지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
부임|활동지 | 김구정 부임지 - 대구광역시 |
부임|활동지 | 김구정 부임지 - 경상북도 의성군 |
부임|활동지 | 김구정 부임지 - 강원도 정선군 |
묘소|단소 | 김구정 묘소 -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 수식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함창(咸昌) |
대표 관직 | 호조정랑|대구도호부사 |
[정의]
조선 후기 영주 출신의 문신.
[개설]
김구정(金九鼎)[1550~1638]은 호조정랑·대구도호부사 등을 지낸 문신이며, 호성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가계]
김구정의 본관은 함창(咸昌), 자는 경진(景鎭), 호는 서현(西峴)이다. 아버지는 선원전참봉을 지낸 김희준(金希俊), 어머니는 천문습독을 지낸 정효종(鄭孝宗)의 딸 숙부인 동래정씨(東萊鄭氏), 할아버지는 장사랑 김사종(金嗣宗), 증조할아버지는 부사과를 지낸 김한민(金漢民)이다. 부인은 통정대부 김응하(金應夏)의 딸 영양김씨(英陽金氏)이다.
김구정의 선대는 원래 개성에 거주하였으나, 고려 말 6대조 김중보(金重寶)가 형제들과 함께 지금의 영주시로 이주하였으며, 할아버지 김사종이 다시 지금의 영주시 단산면 사천리 파회(波回)로 이주하였다. 이로써 파회에는 지금까지 함창김씨 가문이 세거지를 형성하고 있다.
[활동 사항]
김구정은 20세 무렵 남몽오(南夢鰲)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1573년(선조 6) 생원시에 급제하였으며, 1582년(선조 15) 문과에 급제하였다. 1582년 경주훈도를 시작으로 제독교수·원주훈도·성균관학유·사헌부감찰·형조좌랑 등을 지냈다.
김구정은 1592년(선조 25) 호조정랑에 올랐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평양까지 호종하고, 대책을 건의하였다. 1592년 영해도호부사로 부임하였는데, 재임 중 진휼어사에게 장계를 올려 전란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또 고을의 방물을 영주 소수서원으로 보내어 학업의 바탕으로 삼았다. 1594년에는 명나라 장수의 접반관으로 차출되었다. 1599년에는 대구도호부사로 부임하였으며, 1604년(선조 37) 호성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었고, 1608년에는 부모 봉양을 청하여 의성현령이 되었으나, 간관의 탄핵으로 파직당하였다. 1610년(광해군 2) 정선군수를 거쳐, 1612년 다시 대구도호부사를 지냈다.
김구정은 1613년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서궁에 유폐되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629년(인조 7)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의 품계에 올랐으며, 1630년에는 가선대부 용양위부호군에 제수되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1631년 인조가 청나라군에 항복하자, 날마다 서쪽을 향해 망곡하였다. 김구정은 젊은 시절부터 김개국(金盖國)[1548~1603]·금복고(琴復古)[1549~1632]·권호신(權虎臣)[1558~1629]·이여빈(李汝馪)[1556~1631]·박선장(朴善長)[1555~1616]·황서(黃曙)[1554~1603]·곽진(郭𡺽)[1568~1633]·한산두(韓山斗)[1556~1627] 등의 인사들과 교유하였으며, 고향에 반학당(伴鶴堂)을 세우고 입암대(立巖臺)를 축조한 후 소요하였다. 관직을 그만둔 후에는 소수서원의 원장을 역임하였다.
[학문과 저술]
1966년 김구정의 행적을 엮은 2권 1책의 『서현선생실기(西峴先生實紀)』가 간행되었다.
[묘소]
김구정의 묘소는 봉화군 물야면 수식리 원당골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