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6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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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閔應祺 |
영어공식명칭 | Min Eung-gi |
이칭/별칭 | 백향(伯嚮),우수(尤叟),경퇴재(景退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수환 |
출생 시기/일시 | 1530년 - 민응기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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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70년 - 민응기 생원시 급제 |
거주|이주지 | 민응기 거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우곡리 |
묘소|단소 | 민응기 묘소 -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감곡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여흥(驪興) |
대표 관직 | 왕자사부|현감 |
[정의]
조선 전기 영주 출신의 문신.
[개설]
민응기(閔應祺)[1530~?]는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광해군의 왕자사부를 지낸 문신이다.
[가계]
민응기의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백향(伯嚮), 호는 우수(尤叟)·경퇴재(景退齋)이다. 아버지는 생원 민시원(閔蓍元), 어머니는 진성이씨(眞城李氏), 할아버지는 진사 민우삼(閔友三), 증조할아버지는 생원 민소(閔紹)이다. 부인은 창원황씨(昌原黃氏)이다. 민응기의 선대는 관향인 여주에 세거하다 8대조 민혁(閔奕) 대에 지금의 영주 지역에 정착하였다.
[활동 사항]
민응기는 경상도 영천군(榮川郡) 우곡(愚谷)[지금의 영주시 부석면 우곡리] 출신이다. 일찍이 이황(李滉)[1501~1570]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1549년(명종 4) 풍기군수로 재임 중이던 이황과 함께 소백산을 유람하였다.
민응기는 1570년(선조 3) 생원시에 급제하였다. 이후 유일로 천거되어 왕자사부로서 광해군을 가르쳤으며, 『용학석의(庸學釋義)』를 지어 바치니 선조가 『용학석의』의 간행을 지시하였다. 1589년(선조 22) 선조는 왕자사부로 있던 민응기에게 부채에 시를 써서 주었고, 또 어필로 족자를 만들어 하사하였다. 이 무렵 민응기는 매화를 분재해서 길렀는데, 광해군이 매화를 좋아해 바치기를 요구하였다. 이에 민응기는 ‘완물상지(玩物喪志)[쓸데없는 물건을 가지고 노는데 정신이 팔려 소중한 자기의 본마음을 잃어버리는 일]’의 누를 끼칠 수 없다는 내용의 시를 읊으며 거절하니, 광해군이 다시는 매화를 요구하지 않았다.
민응기의 관직은 현감에 이르렀고, 물러난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소요하였다. 항상 스승 이황을 사모하였기에 살던 집의 편액을 ‘경퇴(景退)’라고 지었다.
[묘소]
민응기의 묘소는 영주시 부석면 감곡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민응기는 승정원좌승지에 증직되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왕으로 즉위한 광해군은 이미 세상을 떠난 민응기에게 감사의 뜻을 표시하기 위해, 새해마다 지방관이 그 집을 찾아가 위로할 것이며, 또 제물을 내려주라고 지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