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6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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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成起寅 |
영어공식명칭 | Seong Gi-in |
이칭/별칭 | 천상(天祥),낙애(洛厓)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병훈 |
[정의]
조선 후기 영주 지역에서 활동했던 문신.
[개설]
성기인(成起寅)[1674~1737]은 권두인(權斗寅)[1643~1719]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영주·봉화 지역 인사들과 교유하며 학문 활동을 전개하였다.
[가계]
성기인의 자는 천상(天祥), 호는 낙애(洛厓),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증조할아버지는 헌납 성이성(成以性)[1595~1664], 할아버지는 성석하(成錫夏)[1625~1653], 아버지는 진사 성세황(成世璜)[1648~1708], 어머니는 증 이조참판 박경휘(朴景輝)의 딸 밀양박씨(密陽朴氏)이다. 첫 번째 부인은 남원부사 김세평의 딸 경주김씨(慶州金氏)이며, 두 번째 부인은 통선랑 이원절(李元晢)의 딸 전의이씨(全義李氏)이다.
[활동 사항]
성기인은 지금의 상주시 모동면 용호리에서 출생하였으며, 10세 때 아버지의 지시로 봉화에 있던 권두인에게 학문을 배웠다. 성기인은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순흥도호부 출신인 관계로 어린 시절부터 지금의 영주·봉화 지역 인사들과 교유하였다. 1705년(숙종 31) 식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1706년 승문원부정자가 되었다. 1708년에는 승문원정자로 있으면서 붕당의 폐해에 대하여 상소를 올렸다. 1712년(숙종 38) 성균관의 저작과 박사, 1714년 성균관직강·사헌부감찰·홍문관부수찬·호남어사, 1715년 예조좌랑·병조좌랑을 지냈으며, 1716년 2월 자인현감으로 부임하였다. 1724년 영조 즉위 후에는 홍문관응교에 올랐고, 1725년(영조 1) 관서어사로 나아갔다. 1727년 사예가 되었으며, 1728년에는 개성경력으로 부임하였다.
성기인은 1729년 3월 만경현령으로 부임하였으나, 1730년 사직하고 처가가 있는 성주 다산(茶山)[지금의 고령군 다산면]에 우거하였다. 조정에서는 성기인이 세상을 떠난 줄 모르고, 1741년(영조 17)에 종묘령을 제수하였다. 청백리로도 이름이 높았다.
[학문과 저술]
성기인의 유고로 2권 1책의 『낙애일고(洛厓逸稿)』가 전한다.
[묘소]
성기인의 묘소는 상주시 모동면 용호리 탑골에 있다.
[상훈과 추모]
성기인의 행장은 권상익(權相翊)[1863~1935], 묘갈명은 홍승운(洪承運)이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