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6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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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宋東㣧 |
영어공식명칭 | Song Dong-yun |
이칭/별칭 | 하승(夏承),서계(西溪)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병훈 |
출생 시기/일시 | 1729년 - 송동윤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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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762년 - 송동윤 증광시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769년 - 송동윤 승문원부정자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773년 - 송동윤 충청도사 재임 |
활동 시기/일시 | 1789년 - 송동윤 삼례도찰방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791년 - 송동윤 낙향 |
몰년 시기/일시 | 1799년 - 송동윤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818년 - 서계정 건립 |
출생지 | 송동윤 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시 장수면 호문리 |
부임|활동지 | 송동윤 부임지 -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읍 |
묘소|단소 | 송동윤 묘소 - 경상북도 영주시 장수면 호문리 |
사당|배향지 | 서계정 - 경상북도 영주시 장수면 호문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양주(楊州) |
대표 관직 | 삼례도찰방 |
[정의]
조선 후기 영주 출신의 문신.
[개설]
송동윤(宋東胤)[1729~1799]은 문과 급제 후 삼례도찰방 등을 지냈다.
[가계]
송동윤의 자는 하승(夏承), 호는 서계(西溪), 본관은 양주(楊州)이다. 양주송씨 영주 입향조인 송규(宋珪)[1504~1564]의 7대손이며, 아버지는 송형태(宋亨泰), 어머니는 김학창(金學昌)의 딸 예안김씨(禮安金氏)이다. 부인은 이형신(李亨新)의 딸 숙인 영천이씨(永川李氏)이다. 아들로는 송응규(宋應奎)가 있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나 동생 송성윤(宋聖胤)의 아들 송오규(宋五奎)를 양자로 삼았다. 맏사위는 김응련(金應鍊), 둘째 사위는 박성간(朴成幹)이다.
[활동 사항]
송동윤은 1762년(영조 38) 증광시에 급제하였으며, 1769년(영조 45) 승문원부정자에 제수되었다. 1771년 승문원저작을 거쳐 봉상시직장을 역임하였다. 1772년 성균관직강으로 있으면서 어제시(御製詩)를 반하하였다. 이후 병조좌랑에 임명되었는데, 재임 중 병영의 과중한 군포 징수를 견감하고, 서리의 횡포를 막는 데 앞장섰다.
송동윤은 1773년(영조 49) 충청도도사을 역임하고, 1789년(정조 13)에는 전적·감찰을 거쳐 삼례도찰방으로 부임하였다. 하지만 재임 중 역속들이 공문 없이 말을 내어 준 일이 발생하였고, 1791년 10월 의금부에서 이 일을 계문 하였다. 이에 장(杖) 1백을 수속(收贖)하고, 고신(告身)을 추탈당하였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고을의 누적된 폐단과 악습을 개혁하는 데 매진하였다.
[학문과 저술]
송동윤은 10여 세가 되었을 때 조원승(趙元升)[1687~?]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저서로는 1915년 간행된 『서계유집(西溪遺集)』과 1916년 후손 송봉주(宋奉柱)가 편집한 『서계공소집(西溪公疏集)』이 전한다.
[묘소]
송동윤의 묘소는 영주시 장수면 호문리 녹동마을[청록동]에 있다.
[상훈과 추모]
송동윤의 묘지명은 김세락(金世洛)[1804~1873], 묘갈명은 김약련(金若鍊)[1730~1802], 행장은 류필영(柳必永)[1841~1924], 가장은 증손자 송복휴(宋復休)[1824~?]가 각각 지었는데, 가장은 고손자 송인영(宋仁榮)이 1915년에 추보(追補)하였다. 1915년 간행한 『서계유집』의 서문은 이만규(李晩煃)[1845~1920]가 썼다. 1818년(순조 18) 후손들이 송동윤을 추모하기 위하여 서계정(西溪亭)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