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1311
한자 外孫-本孫-傳-三判書古宅-文香
영어공식명칭 Munhyang of Sampanseo Historic House is Transmitted from Oeson to Bonson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박소희

[정의]

경상북도 영주로 처향을 따라 이거해 온 삼판서인 정운경·황유정·김담의 고택 이야기.

[개설]

경상북도 영주시 가흥동에는 아주 특별한 종택이 있다. 바로 예안[선성] 김씨 종택이다. 삼판서 고택은 원래 영주시 영주동에 있었으나 1961년 영주 대홍수로 무너진 것을 2008년 10월 구학공원 내 현재 위치에 복원하였다. ‘삼판서’라는 이름은 이 고택에서 세 명에 달하는 판서가 배출되었기 때문에 붙여졌다. 이는 정운경(鄭云敬)[1305~1366], 황유정(黃有定)[1343~?], 김소량(金小良)[1384~1449]의 아들 김담(金淡)[1416~1464] 때문인데, 이들은 여말선초 일반적이었던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신랑이 신부집에서 혼례를 치르고 혼인생활을 시작]의 혼인 풍습에 따라 구생(舅甥)[장인과 사위의 관계]을 맺으며, 삼판서 고택에 세거하였다. 고려시대 이후 영주 지역이 선비의 고장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데에는 여말선초 삼판서 고택을 중심으로 명망 있는 관료와 학자들이 연이어 세거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삼판서 고택이 특별한 이유]

영주시의 삼판서 고택이 특별한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로 사위들이 처가의 가택을 상속받아 지켜왔다는 것이다. 전통시대 혼인이라고 하면, 흔히 친영제(親迎制)[혼례 당일에 신랑이 신부를 자신의 집으로 맞아들이는 풍속]에 입각해, 신부가 신랑의 집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런데 사위가 처가에 들어와 살았다고 하니, 이것은 여말선초 당시에는 고려의 자녀균분상속(子女均分相續) 제도와 남귀여가혼의 풍습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후 조선시대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정착과 친영제의 도입으로 이 종택은 예안김씨 종가로 이어져 오게 되었다.

특별한 두 번째 이유는 판서를 세 명이나 배출했다는 것이다. 이 고택이 삼판서 고택으로서 역사를 시작한 것은 고려 말 영주 지역의 사족이었던 단양우씨 가문과 봉화정씨 가문이 혼인을 맺으면서부터이다. 정도전의 아버지인 정운경은 남귀여가혼에 의해 처가가 있는 영주로 이거해왔다. 이후 정운경의 딸 봉화정씨평해황씨 황유정이 혼인하면서 처가의 가택은 황유정에게 상속되었고, 황유정 역시 사위인 예안김씨 김소량에게 고택을 물려주었다. 정운경이 고려시대 형부상서[조선시대 형조판서], 황유정이 공조판서, 김소량의 아들 김담이 이조판서에 오르면서 한 집에 세 명의 판서가 배출되었다.

[봉화정씨 정운경, 처가가 있는 영주에서 만년을 보내다]

정운경의 본관은 봉화이며, 증조할아버지는 봉화현의 호장 정공미(鄭公美), 할아버지는 비서랑동정 정영찬(鄭英粲), 아버지는 검교군기감 정균(鄭均)이다. 정운경의 아들들은 조선 개국 공신인 정도전, 참판 정도존(鄭道存), 한성판윤 정도복(鄭道復)이며, 사위는 공조판서를 지낸 황유정이다.

봉화정씨 가문은 정운경 대에 와서 크게 성장하였다. 정운경은 외삼촌이던 안분(安奮)을 따라 개경으로 가서 7세 연상의 이곡(李穀)과 교제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곡은 훗날 정도전을 필두로 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 등 이른바 신진사대부의 스승이 되는 이색의 아버지이다.

정운경은 1326년(충숙왕 13) 사마시에 합격하고, 1330년 문과에 급제, 다음 해에 상주목사록에 임명되었다. 이후 정운경은 1338년(충숙왕 복위 7) 주부에 올랐으며 윤팔월에는 도평의녹사가 되었다. 이 무렵 정운경은 원나라 어향사를 맞이하는 접반사로 임명되었는데, 이때 정운경의 강직한 성품을 보여주는 일화를 남기게 된다. 당시 어향사가 공사(公事)를 논의하는 자리에 기생을 데리고 오자, 정운경은 기생을 꾸짖어 밖으로 내보내려 하였다. 그런데 오히려 어향사가 화를 내자 정운경은 그를 추하게 여기고, 사직해 버린 것이다. 이후 삼사판관, 양광도안렴사, 교주도안렴사, 전주목사, 존무강릉 겸 삭방도채방사 등으로 부임하였다. 1359년(공민왕 8)에 형부상서로 승진하고, 1363년에는 검교밀직제학 보문각제학 상호군에 임명되었다. 20대 초반에 관직을 시작한 정운경은 죽기 3년 전까지 고려와 백성을 위해 선정을 베풀었다. 청백리로도 명성이 높아 사후 벗들이 정운경에게 ‘염의(廉義)’라는 사시(私諡), 즉 시호를 지어주었다. 조선 후기인 1832년(순조 32) 문계서원(文溪書院)[봉화군 상운면 문촌리]에 배향되었으며 1922년 후손들이 묘소 아래에 모현사(慕賢祠)[영주시 이산면 신암리]를 짓고 위패를 봉안하였다.

한편, 삼판서 고택은 조선을 설계한 정도전의 고향집이기도 하다. 정도전은 이 집에서 유년기를 보냈으며, 유배지에서 풀려난 후 한동안 거처했던 곳 역시 이 고택이었다. 정도전은 관직에 있으면서 영주와 고향집에 대한 그리움을 시(詩)로 남기기도 하였다.

[평해황씨 황유정, 처가의 가택을 상속받다]

황유정의 초명은 지정(知定), 호는 미균(米囷), 본관은 평해(平海)이다. 평해황씨 가문은 황유정의 할아버지였던 영해부사 황원로(黃原老) 대에 영천 초곡[영주시 조암동]으로 이주하였다. 당시 마을을 개척할 때 풀숲이 우거져 있었기에 ‘푸실[초곡]’로 불렸다. 황유정의 아버지는 공민왕 대에 성균관사예 겸 예문관직제학을 지낸 황근(黃瑾)이며, 어머니는 안축(安軸)의 딸인 순흥안씨(順興安氏)이다. 황유정은 3남 1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그리고 정운경의 딸이자 정도전의 누이인 봉화정씨(奉化鄭氏)와 혼인하였다. 황유정 역시 남귀여가혼에 의해 초곡을 떠나 정운경으로부터 가장(家庄)을 물려받고 영주 읍내로 옮겨와 살았다. 그 집이 바로 현재의 삼판서 고택이다.

1355년(공민왕 4) 12세 때 안동도회(安東都會)에 참가했을 때, 시관(試官)이 감탄하며 과거 응시를 권할 정도로 훌륭한 시를 지었다고 한다. 1390년(공양왕 2) 48세의 나이에 초계군수를 지냈으며 한성판윤을 거쳐 예조전서·공조전서·형조전서를 역임하였다. 조선 건국 이후에는 공조판서·형조판서·예조판서를 지냈다. 이후 병환으로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 구성(龜城)[지금의 영주시 영주동]으로 내려와 ‘소쇄헌(掃灑軒)’이란 현판을 걸고 만년을 보냈다.

[김소량·김담, 예안김씨 500년 종택으로 이어지다]

황유정 이후 삼판서 고택은 사위 김소량에게 상속되었다. 김소량의 본관은 예안이다. 예안김씨는 고려 때 예안호장을 지낸 김상(金尙)을 시조로 하며, 대대로 호장직을 역임하였다. 김소량의 아버지인 8세 김로(金輅)는 보승장군을 지냈으며 윤백기(尹伯奇)의 딸 파평윤씨(坡平尹氏)와 혼인하였다. 당시 김로까지는 본관지인 예안에 거주하였으며 9세손 김소량 대에 평해황씨와 혼인하면서, 예안을 떠나 영주로 이거하게 되었다.

삼판서 고택의 세 번째 판서인 김담이 바로 김소량의 아들이다. 김담의 자는 거원(巨源), 호는 무송헌(撫松軒),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김담의 부인은 정부인 감천문씨(甘泉文氏)로 장인은 성균관직강을 지낸 문질(文質)이다. 김담은 1416년(태종 16) 삼판서 고택에서 출생하였다. 1435년(세종 17) 형 김증(金潧)과 함께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였고, 바로 집현전에서 활동하였다. 1437년 집현전저작랑을 거쳐 1439년 집현전박사에 올랐으며, 1440년에는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국어(國語)와 음의(音義)를 보정하였다. 1449년(세종 31) 아버지 김소량이 죽자 사직하려 했으나 세종이 상중에 벼슬에 나아가는 기복(起服)을 특별히 명하였다. 이후 김담은 출사하여 이순지(李純之)와 함께 역법을 연구하게 되었다. 세종은 그런 김담을 총애하여 옷 1습(襲)과 미두(米豆) 10석을 내려주기도 하였다.

특히 김담은 집현전 학자 출신으로서 관직에 있으면서 국가가 주도하는 각종 편찬 사업에 참여하였다. 대표적으로 역법서인 『칠정산내편』과 『칠정산외편』을 남겼으며, 『대통력일통궤』, 『태양통궤』, 『태음통궤』, 『역대병요』 등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1464년(세조 10) 세상을 떠나자 세조가 직접 예관(禮官)을 보내 치제하였다. 문집으로 6권 3책의 『무송헌집(撫松軒集)』이 전한다.

[현재를 살아가는 650년 전통의 삼판서 고택]

영주시의 삼판서 고택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오랜 역사와 문화를 담고 있는 곳이다. 그래서 영주시민뿐만 아니라 외지에서도 많은 사람이 삼판서 고택을 찾고 있다. 2018년에는 경상북도에서 주최하고 사단법인 선비정신실천운동본부가 주관하는 선비문화 탐방이 영주에서 진행되기도 하였다. 당시 탐방의 주제는 ‘선비의 물길 따라 「개국의 물길 따라-영주편」’이었는데, 이때 탐방의 중심 코스가 바로 삼판서 고택이었다.

또한, 영주시에서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시티투어를 통해 제민루삼판서 고택의 역사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그리고 2018년에 동양대학교 한국선비연구원과 영주문화연구회 주관으로 열린 인문학 강좌에서도 삼판서 고택을 중심 소재로 다루었다. 이처럼 650년 전통의 삼판서 고택은 매일매일 다양한 관광객을 접하고 있으며, 여러 각도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비록 지금의 삼판서 고택은 현대에 새롭게 지어진 건물이지만, 그 속에 흐르는 650년간 스토리는 많은 이들의 발길을 이곳으로 돌리게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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