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13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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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鄒魯之鄕-芙蓉契 |
영어공식명칭 | Buyonggye(Meeting of Classical Scholar) Dream about Churojihyang(Full Place of Stud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두서길 73-27[영주동 150]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태환 |
부용공원 위치 | 부용계 - 경상북도 영주시 두서길 73-27[영주동 1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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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601년 영주 지역 선비들이 만든 자치계.
[개설]
경상북도 영주 지역의 부용계(芙蓉契)는 사마회(司馬會)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사마회 모임의 장소인 사마소(司馬所)는 일명 북정자(北亭子)로 당시 영천군(榮川郡) 서북쪽 2리 고청산 남쪽 기슭에 있었다. 북정자는 영주의 사마(司馬)[생원과 진사]들이 모여 학업을 닦던 곳으로 처음에는 이름이 없었는데,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이 그 정자를 ‘붕래정(朋來亭)’이라 하고 대를 ‘부용대(芙蓉臺)’라 명명하였다.
부용계는 향풍을 바로잡고, 어른을 공경하며, 선비의 기상을 높이기 위한 사마회로 1509년(중종 4)에 설립되었는데, 1573년(선조 6) 또는 1581년(선조 14)경 사마소와 함께 혁파되었다가, 1601년(선조 34) 다시 중수되었다. 1636년(인조 14)에는 사마 55명이 부용대에서 ‘계(契)’의 중수 회합을 했다. 그 후 1774~1775년경 다시 부용계의 회합이 있었고, 1853년(철종 4)에도 계가 개최되었다. 현대에 접어들어서도 그 전통은 지속되어 1970년 부용계가 속계(續契)되었고, 1996년에는 영주의 구성공원에 ‘부용계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016년에는 다시 ‘부용계기념비’를 옛 부용계의 터전인 부용공원으로 이건하고 비각을 세웠으며 ‘부용계기적비’를 함께 건립하였다.
[부용계의 발자취]
영주 지역의 부용계는 사마계라고도 하는데, 중국 회계산(會稽山) 난정(蘭亭)의 풍류를 이어받아 창계하였다. 일찍이 중국 동진(東晉)의 왕희지(王羲之)는 353년[영화 9년 계축(癸丑)] 회계산 난정에서 유상곡수(流觴曲水)[구불구불한 물길에 술잔을 띄우고 술을 마시는 풍류], 일영일상(一詠一觴)[때로는 술을 마시고 때로는 시가를 읊음]하던 풍류를 즐겼었다. 영주 부용계도 난정의 풍류를 되살려 지역의 향풍을 바로잡고, 어른을 공경하며 선비의 기상을 드높이고자 창계하였다. 중국에는 회계산에 난정이 있어 그 풍류를 즐겼다면, 이곳 영주 지역에는 고청산(高靑山)에 붕래정과 부용대가 있어 이러한 옛 풍류를 이어올 수 있었다.
해좌(海左) 정범조(丁範祖)가 지은 「부용계회첩서(芙蓉契會帖序)」에 의하면 1509년에 창계한 사마회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데, 1555년(명종 10) 퇴계 선생이 고을의 여러 선배 명사들과 함께 이곳 부용대에서 시회를 개최하는 등 모임을 주도해 왔다. 그 후 조정의 금지로 폐하였다가 1601년에 이르러 다시 중수하여 계가 만들어졌다면서, 부용계의 설립 경위를 밝혀 놓았다.
이후 영주 지역 선비들은 옛 전통을 계승하여, 회원 간의 친목을 다지기 위한 부용계 모임을 간헐적으로 가지게 된다. 1636년(인조 14) 음력 8월 6일 영주 고을에 사는 선비 중 사마시에 합격한 진사 27인과 생원 28인 도합 55명이 회원 간 친목을 다지기 위하여, 부용대에 모여 부용계 중수 회합을, 1640년(인조 18)에도 모임을 했다. 또 「부용계회첩서」에 따르면, 정범조가 풍기군수로 있으면서 부용계에 참석했다고 하니, 1774년(영조 50)과 1775년(영조 51) 사이에도 부용계 회합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790년(정조 14)에 다시 모임이 있었고, 1853년(철종 4)에도 다시 계가 개최되는데, 이때 모습은 황암(篁巖) 김진하(金鎭河)의 「부용대속회첩기(芙蓉臺續會帖記)」와 성암(星庵) 박종후(朴宗垕)의 「부용대속회서(芙蓉臺續會序)」에 잘 나타나 있다.
1862년(철종 13)의 모임을 끝으로 조선시대 동안 부용계 회합 기록은 더는 문헌상에 나타나지 않으며, 근대 이후 오랫동안 단절되어 있었다. 그러다 1970년경 부용계의 한 후손가에서 관련 고문서가 발견되었다. 이에 옛 부용계 구성원의 후손들이 조상들의 유덕을 기리기 위하여 다시 모임을 하기 시작했으며, 1995년 구성공원 가학루 옆에 ‘부용계기념비’를 세우고 매년 음력 8월 6일에 추모 행사를 지내오고 있다.
[부용(芙蓉)이란?]
부용계의 모임 장소가 부용대인데, ‘부용(芙蓉)’[연꽃이 피어나기 전의 봉우리를 뜻하는 말]이라는 이름은 이황이 명명하였다. 일찍이 영주 지역과 인연을 맺고 있던 이황은 사마들이 회합하는 정자와 대에 이름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여, 정자의 이름을 ‘붕래정’, 대의 이름을 ‘부용대’라고 명명하였다. 그 과정은 유연당(悠然堂) 김대현(金大賢)이 쓴 「서사마계좌목후(書司馬契座目後)」를 통해 살펴볼 수 있는데, 이에 따르면 남계(南溪) 금축(琴軸)이 퇴계에게 정자의 편액을 청하였고, 퇴계는 “옛날 동한(東漢)의 이고(李固)가 관상쟁이를 만나자 말하기를 ‘내년에 부용방(芙蓉傍)에 급제를 할 것이오’라고 말해 오늘날 사람들은 사마를 연방(蓮傍)이라고 하니 부용으로 대의 이름을 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라며 답서한 뒤, 손수 큰 글씨를 써서 보내왔다고 한다.
[부용대와 붕래정]
부용대와 붕래정은 영주 지역 사마들이 모임을 가지던 장소이다. 『영천군지(榮川郡誌)』 취사본(炊沙本)[1625년]과 학사본(鶴沙本)[1644년]에 따르면, 부용대는 영천군 서쪽 2리 고청산 남쪽 기슭에 있는데, 동쪽에는 붕래정이 있고 서쪽에는 사계서당(泗溪書堂)이 있으며, 대의 아래에 맑은 샘이 흐른다고 하였다. 지금의 영광중학교[영주시 광복로 17 소재] 왼편 길을 따라 약 100m쯤 가면 갈림길이 나오고, 그곳에서 왼편 길을 따라 서천교 방향으로 약 200m쯤 가면 왼쪽에 황실침장이 넓은 바위 위에 지어져 있는데, 이 바위 주변이 옛 ‘부용대’ 터로 추정된다. 옛날 서천의 물길이 이 바위 아래를 감돌아 구성공원 앞으로 흘렀기에, 당시 이 바위 주변에는 버드나무숲과 맑은 개천물이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붕래정은 사마소로 활용되었다. 『영천군지』에 따르면 붕래정은 군의 서북쪽 2리에 있는데 부용대 동쪽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곳은 옛날의 ‘사마소’로 사마들이 봄·가을에 계를 맺고, 고을 풍속과 기강을 주장했다고 하였다. 또 퇴계가 그 정자를 ‘붕래’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1581년경에 조정의 명령으로 혁파되었음을 언급해 놓았다. ‘붕래(朋來)’는 『논어(論語)』「학이(學而)」편의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온다면 즐겁지 않겠는가?[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에서 가져왔다.
박종후의 「부용대속회서」에는 부용대와 붕래정의 풍광을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고을의 진산으로 철탄산이 용이 꿈틀대듯이 빙 둘러 가득 차서, 세 번 굴러서 북청산(北靑山) 아래 이르면 바위 낭떠러지가 중복되고 포개어진 돌이 굳게 얽히어 있다. 그 위가 조금 평탄하여 80~90인이 앉을 수 있고, 그 아래 사수(泗水)가 남으로 흘러들어서 쌍구대(雙龜臺) 가운데가 탁 트여 있다. 여기서 푸른 물이 흐르니 제방의 형상이 남진(南津)의 언홍(堰虹) 같다. 숲이 더부룩하게 우거져 매년 봄여름 사이에 꾀꼬리가 떼를 지어 위아래에서 그 고운 소리를 내니, 우리 영천은 대개 좋은 정자와 대가 많지만, 여기가 그 갑을(甲乙)이 될 것이로다”라고 하였다.
[망궐리와 사수]
김진하는 「부용대속회첩기」에서 부용대가 위치한 곳이 “망궐리(望闕里)이고 앞의 물이 사수이다. 중국의 공자(孔子)가 태어난 궐리(闕里)와 사수의 지명과 같다.”라고 하였다. 지명의 유사성을 통해 영주 선비들은 공자의 학문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고자 했다. 또한 망궐대(望闕臺)를 만들어 공자의 사상과 학문을 숭상했다. 이 사수와 궐리, 망궐대와 사계서당·사계진(泗溪津)이라는 지명에서 우리는 추로지향(鄒魯之鄕)[공자의 고향인 노나라와 맹자의 고향인 추나라와 같이 예절을 알고 학문이 왕성한 곳]을 꿈꾸고 이를 실천하려 했던 영주 선비들의 의지가 강하게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거기다 부용대와 붕래정은 공자의 학통을 계승한 이황이 명명하고 이곳에서 시회를 주최하였으니, 그 유서의 깊고 넓음이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입의와 조례]
정범조는 「부용계회첩서」에서 풍기군수로 재임 중 부용계 모임에 참석했는데, 이때 「부용계첩(芙蓉稧帖)」을 보고 “입의(立議)와 조례(條例) 및 계인(稧人)의 성명이 개략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라고 하였다. 그 입의와 조례를 살펴보면, 먼저 부용계는 향풍을 바로잡고 어른을 공경하며 선비의 기상을 높이는 데 운영 목적이 있었다. 또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준행할 것이며, 이것을 위해 첫 번째, 신약(信約)을 강(講)하고, 두 번째, 풍속을 권면하고, 세 번째, 재상(灾喪)을 구휼하고, 네 번째, 동몽(童蒙)을 가르치며, 다섯 번째, 군정(郡政)의 득실을 논하고, 여섯 번째, 연회(宴會)로써 향속을 두텁게 하고, 일곱 번째, 준조(樽俎)로써 교화를 편다고 하였다. 실로 부용계는 조선시대 동안 선비 고장 영주의 향풍 진작에 구심처가 되었다.
[구성과 활동]
부용계는 대과(大科)에 급제했더라도, 사마시에 합격자가 아니면 참여하지 못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당대 명망 있는 인사들이 부용계에 대거 포진되어 있었다. 하지만 1853년의 「부용대속회첩기」에는 사마가 아닌 이들도 좌목에 입록되어 있어, 조선 후기 어느 시점에 참여 요건이 변화한 것으로 보인다.
부용계는 주로 자기 수양과 정치토론을 통해 상호 간의 결속력을 다졌으며, 이산서원(伊山書院)[영주시 이산면에서 이황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의 관리와 운영에도 관여하였다. 또한, 수령의 통치를 보좌하고 때로는 견제하며, 지방행정에도 영향을 끼치는 등 향촌 자치 기구의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이 밖에도 부용계는 술을 마시며 수창을 하는 교류의 장으로 활용되었으며, 사계서당을 건립하여 후학 양성에도 앞장섰다. 국란이 있을 때도 부용계는 좌시하지 않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인좌(李麟佐)의 난 등 국란이 있을 때마다 부용계 회원들은 의병을 조직하여 위란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고, 절의를 지키는 등 선비의 고장인 영주의 위상을 드높였다.
특히 「숭정원년 병자 8월 초 6월 부용계제록[崇禎元年丙子八月初六日芙蓉契題錄]」에 입록된 인사들의 절의는 더욱 두드러진다. 대표적으로 홍익한(洪翼漢)은 삼학사(三學士) 중 한 명이고, 김강(金鋼)과 나이준(羅以俊)은 병자호란 때 성균관 대성전에 모셔져 있던 5성(五聖)의 위패를 남한산성까지 모신 인물이다. 그 외에도 많은 부용계원들이 관직에 진출하여, 국정 운영에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수백 년간 향촌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해 왔다.
이러한 부용계의 정신은 근대 이후에도 계승되었다. 영주 출신의 많은 인사가 구한말 소백산 등지에서 의병항쟁을 전개하였으며, 일제 식민 통치하에서는 독립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6.25전쟁 때 향토를 수호하고, 이후 경북 영주 출신 인사들이 조국 근대화에 앞장서게 되는 것도 부용계 정신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부용계 정신의 계승]
경상북도 영주 지역의 선비들은 자신들의 고장을 공자의 고향인 추로지향으로 삼아, 학문을 숭상하는 유학의 본거지로 삼고자 하였다. 부용계의 터전이 되었던 부용대 주위의 명칭은 공자의 고향을 옮겨 놓은 것이다. 부용대가 위치했던 곳의 물을 ‘사수’라 하고, 마을을 ‘망궐리’라 했는데, 공자의 고향이 중국 사수이며, 그 동네가 바로 궐리였다. 이러한 부용계의 전통과 정신은 ‘추로지향 영주’, ‘선비의 고장 영주’를 넘어 우리나라, 그리고 세계를 이끌어가는 시대정신으로 삼을 만하다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