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13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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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精神文化超越-度量榮州紹修書院 |
영어공식명칭 | Sosu Confucian Academy of Yeongju that Transcend Moral Culture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자운 |
[정의]
경상북도 영주시에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과 그 정신문화.
[개설]
영주 소수서원(榮州紹修書院)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자, 사액서원으로 조선 유학의 메카였다. 우리나라 서원의 전범(典範)을 제시하고, 나아가 학문을 숭상하고 절의를 지키는 유교적 인격 배양에 노력하였다. 1543년(중종 38)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서 출발하여 1550년(명종 5) 소수서원(紹修書院)으로 사액을 받고, 대원군의 서원훼철령(書院毁撤令)[고종 연간 흥선대원군이 전국의 서원을 47개소만 남기고 철폐하라고 내린 명령]에도 철폐되지 않고 존속하며 많은 선비를 배출하였다. 그 결과 영주시는 우리나라 성리학의 요람이자 대표적인 선비의 고장이 되었다.
소수서원에서 제시한 여러 가지 전범은 한국 서원 제도와 정신문화의 모태가 되었다. 첫째, ‘도통’과 ‘지역적 연고’라는 서원의 제향 인물 선정 기준을 제시하였다. 주세붕(周世鵬)은 사묘의 향사 대상으로 주자학을 최초로 도입한 동방 도학(道學)의 전수자이자 영주시 풍기읍 출신으로서 지역적 연고까지 동시에 갖춘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을 선정함으로써, 이후 ‘도통’과 ‘지역적 연고’라는 서원의 향사 대상 선정에 있어 중요한 두 가지 기준을 확립하였다. 둘째, 국가에서 최초로 사액을 받음으로써, 조선의 서원이 일개 고을의 시골 학교나 한 지방관 개인의 흥학 활동 차원에 머물지 않고, 국가의 공인과 지원으로 지속해서 발전할 수 있는 공적, 제도적 기반을 확보한 데서 찾을 수 있다.
셋째, 소수서원의 향사 의례는 서원 향사 의례의 전범이자 예악이 조화를 이룬 고유한 의례 문화이다. 소수서원에는 서원 향사 의례 절차를 기록한 한국 최초의 홀기(笏記)[제례 등 의식에서 그 진행 순서를 적은 글]이자 가장 오래된 홀기가 현전하고 있어 서원 향사 의례 절차의 시원적인 모습을 잘 보여준다. 또한 한국 서원 중 유일하게 향사 절차에 「도동곡(道東曲)」이라는 제례악이 불림으로써 예악이 조화를 이룬 고유한 의례 문화를 보유하고 있다.
넷째, 백운동서원을 창건한 직후 주세붕은 원규를 제정하여 서원의 존재 의미를 밝히고 서원 운영과 관리를 위한 기본 틀을 제시하였다. 다섯째, 소수서원은 어느 서원보다도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서원 교육의 실상을 시계열적으로 보여주는 강학 자료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어 서원 강학 연구에 귀중한 사례가 된다.
[백운동서원의 창건과 소수서원 사액]
소수서원은 주세붕이 풍기에 세웠던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 사액을 받으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영주시 풍기읍은 중국에서 처음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들여온 문성공 안향의 자취가 어린 곳이었다.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은 이러한 유서가 깃든 곳에 향교가 황폐해진 것을 보고 우선 퇴락한 향교의 중건에 착수하였고, 향교 이건이 끝나자 1542년(중종 37) 봄에 바로 문성공묘 건립을 시작하여 그해 8월 준공하고 회헌 영정을 봉안하였다. 이듬해인 1543년(중종 38) 강학당을 세우고 백운동서원을 창건하였다.
1543년 9월, 서원의 규모가 어느 정도 갖추어지자 주세붕은 지역 출신 인물이자 안향의 족손(族孫)[성이 같은 사람들 가운데 유복친 안에 들지 않는 손자뻘이 되는 사람]인 안축(安軸)[1282~1348]과 안보(安輔)[1302~1357] 형제를 배향하였다. 후일 서원 창건의 공을 인정받은 주세붕 역시 1633년(인조 11) 추가로 배향되었다. 1546년(명종 1)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한 안현(安玹)[1501~1560]은 서원 운영을 위한 제반 규정과 재정적인 기초를 확립하기 위해 「사문입의(斯文立議)」를 제정 및 시행하였다. 이후 퇴계 이황의 노력과 경상감사 심통원의 청원으로 창건된 지 8년째 되는 1550년 백운동서원은 국가로부터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사액을 받게 된다. 이로부터 국가에서 최초 사액을 받은 소수서원의 존재는 국내에 널리 알려져 전국에서 유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소수서원은 초창기 서원의 대표적 존재가 되었다.
[서원의 전범을 제시한 최초의 서원]
16세기 조선은 관리의 기강 해이, 과거제의 문란 등으로 점차 관학이 쇠퇴하면서 교학 진흥책의 강구가 매우 시급한 현실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지방 교육 진흥책의 한 대안으로 중국 송대의 서원 제도가 거론되기 시작하였고, 이는 한 고을의 지방관에 의해 최초의 실현을 보게 된다. 주세붕은 남송대 주자의 고사를 따라 1542년 유학에 공이 있고 지역적 연고를 동시에 갖춘 안향의 사묘를 먼저 세우고, 이듬해인 1543년 추가로 서원을 건립함으로써 조선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을 창건하였다. 주세붕은 “교육이란 반드시 존현(尊賢)[어질고 착한 사람을 받들어 공경함]에서 비롯되므로 사묘를 세워 덕 있는 이를 숭상하고 서원을 세워 학문을 돈독히 한다,”라는 명분 아래 최초로 서원을 건립한 지방관이자 동시에 사묘와 서원을 최초로 결합한 장본인이었다. 사묘와 서원의 결합은 이후 조선 후기까지 ‘제향’과 ‘강학’이라는 양대 기능을 담당하면서 서원의 공간 구조 역시 사묘를 중심으로 한 제향 공간과 서원[강당]을 중심으로 한 강학 공간으로 제도화되기에 이른다.
또한 강학에 보다 비중을 두었던 중국 서원과 달리, ‘가르침은 존현에서 시작된다.’라는 명분 아래 주세붕이 안향의 사묘를 서원보다 먼저 세운 것은 이후 강학보다는 제향 인물 위주로 건립되는 서원의 경향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향촌의 학교를 국가 공인 교육기구로 견인한 사액 제도의 확립]
소수서원의 가장 큰 공헌 중 하나는 무엇보다 국가에서 최초로 사액을 받음으로써, 서원이 국가의 공인과 지원하에 있는 공적, 제도적 기반을 확보한 데서 찾을 수 있다. 이는 당시 사림에 의한 향촌 사회의 교화를 꿈꾸며 서원에 주목하고 있던 이황이 풍기군수에 임명됨으로써 그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황은 풍기군수에 부임하자 백운동서원에 자주 들러 제생들과 함께 주자학을 강론하고, 향사 제도를 개정하며, 유식 공간을 조성하는 등 서원 정비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지방관의 지원만으로는 서원이 조선 사회에 정착, 보급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이에 이황은 경상감사 심통원에게 편지를 보내, 관학제도가 무너져 선비의 습속이 쇠퇴의 극에 달했는데 이를 구제할 방도는 오직 서원밖에 없으며, 천만다행으로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을 세워 모범을 보였으나 이는 일개 군수의 행위에 불과하여 마치 근원 없는 물이 아침에 가득 찼다가 저녁에는 말라버리는 것처럼 오래가지 못할 것이니, 근본이 있어 멀고 오래가는 교육을 실현하기 위해 중국 송나라의 고사를 따라 백운동서원에 현판을 내리고 서적 및 토지·노비의 지급을 조정에 청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 결과 마침내 ‘소수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최초의 사액을 받음으로써 국가 공인 교육기관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를 통해 향후 조선시대 성리학의 독자적 학문 체계를 구축하는 기반이자 이후 사림의 활동 무대로서 공적, 제도적 기반이 비로소 확립될 수 있었다.
[서원 향사의 전범을 제시한 최초의 홀기]
소수서원에는 서원 향사 의례 절차를 기록한 한국 최초의 홀기가 현전하고 있다. 창건 당시 주세붕이 제정한 친필 홀기와 1549년(명종 4) 이황이 수정한 친필 홀기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 자료는 서원 향사 의례 절차의 시원적인 모습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이황이 보완한 서원의 향사는 관학인 향교의 석전을 기준으로 함을 천명하고 있으며 앞의 주세붕이 제정한 홀기를 수정하는 사유와 의례절차의 의미를 고증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까지도 서원 향사는 물론 향교 석전에서도 가장 표준적인 자료가 되고 있다.
이황은 진설에 대하여 학교의 제사에 밀과를 쓰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여 대신 녹해(鹿醢)[사슴 고기로 담근 젓]를 쓰게 했으며, 밤 대신 어수(魚鱐)[건어나 포와 같은 마른고기]로 교체하였다. 이황의 진설법을 보면 먼저 왼쪽 변에는 말린 생선과 사슴고기 포, 대추와 잣을 진설하며 오른쪽 두(豆)에는 물고기 젓과 사슴고기 젓갈, 무와 부추를 올린다. 그 사이 왼쪽에는 양 보(簠)를 두는데, 보에는 쌀과 조를 담고 오른쪽에는 양 궤를 두어 메기장과 차기장을 담는다. 그 아래 조(俎)에는 닭을, 그 아래로는 폐백을 놓았다. 현재도 소수서원의 향사는 이황의 진설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예악(禮樂)이 조화를 이룬 전국 유일의 고유한 향사 의례]
소수서원의 향례 절차에는 다른 서원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전통이 있다. 바로 삼헌관이 헌작할 때마다 「도동곡」이라는 악장(樂章)을 부른다는 것이다. 「도동곡」은 주세붕이 지은 것으로, 가사의 내용은 유학의 연원과 그 실천, 공자와 주자 등의 도학을 칭송하고, 이 도학이 안향에 의하여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된 것을 찬양하는 것으로 총 9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향사 의례에서 「도동곡」이 불리는 절차는 당시 주세붕과 이황의 친필 홀기에는 나오지 않고, 『죽계지』「행록후」의 제사법식에 등장한다. 이를 따라서 오늘날 사용하는 홀기에는 악정(樂正)이라 하여 그 순서가 들어 있다.
실제 향사에서는 초헌례에서 축관이 축문을 읽고 나면 「도동곡」 1-3장[수장]을 노래하고, 아헌례에서 안향의 신위에 술을 따른 다음 4-6장[중장]을 부르고, 종헌례에서 역시 안향의 신위에 다시 술을 따르면 7-9장[종장]을 노래한다. 또 「도동곡」을 잘 아는 장로 1인과 젊은 유생 1인이 묘정에 마주 서서 같이 부르게 함으로써 젊은 세대들에게 「도동곡」의 전통을 전승하고 있다. 「도동곡」을 부르는 유생은 헌관이 바뀔 때마다 장로를 제외한 젊은 유생 3인으로 교체하여, 실제 향사에서 「도동곡」을 부르는 사람은 모두 4명이 된다.
우리나라에서 종묘와 문묘를 제외하고 제례에서 노래가 불리는 곳은 영주 소수서원이 유일하다. 「도동곡」은 제례악일 뿐 아니라 유학의 연원과 도통, 소수서원에 향사된 안향의 업적을 기리고 본받는 교육적 효과를 동시에 지니고 있으며, 현대 교육이 상실한 예와 악이 조화를 이룬 소수서원만의 고유한 의례 전통이자 교육 전통이다.
[초창기 서원 원규의 전범이 된 백운동서원 원규]
백운동서원을 창건한 직후 주세붕은 원규를 제정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존현처’로서 서원의 존재 의미를 강조한 백운동서원 원규는 이후 이황이 제정한 이산서원 원규와 함께 초창기 서원 원규의 전범이 되었다.
백운동서원 원규는 서두에 먼저 서원 운영의 큰 틀을 5개 강령으로 제시하고, 이하에서 5개 강령에 대한 상술 및 임원 조직, 제향, 입원 규정, 관리를 위한 세부 조항을 규정하고 있다. 5개 강령은 ‘제사를 경건히 하고[謹祀], 현인을 예우하며[禮賢], 사우를 수리하고[修宇], 창고를 비축하며[備廩], 서책을 점검한다[點書]’라는 것으로, 그중 근사(謹祀), 예현(禮賢), 수우(修宇)는 모두 존현(尊賢)에 대한 것이고, 나머지는 서원의 운영 기반과 관리에 대한 것이다. 주세붕은 서원의 존재 의미를 무엇보다 ‘존현’에 두고, 이를 위한 재정 기반 및 강학의 기반으로서 서책 관리를 매우 중시하며, 서원의 이념과 운영을 위한 핵심적인 원칙을 원규에 담아내고 있다.
백운동서원 원규가 ‘존현처’로서 서원의 의미를 강조했다면, 이후 이황이 지은 이산서원 원규는 ‘강학처’로서 서원의 존재 의미를 밝힌 것이었다. 최초의 원규로서, 존현처로서 서원의 의미와 서원 운영의 기본 원칙을 제시한 백운동서원 원규는 이후 이산서원 원규와 함께 후대 서원 원규의 전범이 되어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특히 근사, 예현, 수우, 비름, 점서의 5개 강령은 영봉서원, 오산서원 등 주로 초창기 남인계 서원들이 자주 원용하거나 차용하였다.
[소수서원의 문화유산과 강학 자료]
소수서원은 국가의 하사, 개인의 기증 혹은 서원 자체에서 마련한 영정, 장서, 목판, 편액 등 다양한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다. 영정으로는 안향 초상[국보 제111호],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보물 제485호], 주세붕 초상[보물 제717호]이 있으며, 이는 이원익·이덕형·허목·채제공의 영정과 함께 모사본이 영정각에 봉안되어 있다.
또한, 창건 당시부터 각별한 관심과 노력으로 수집, 관리된 수많은 장서 및 16세기 이래 서원의 재정, 운영, 강학 현황을 기록한 다양한 고문헌들도 소장하고 있다. 특히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서원 교육의 실상을 시계열적으로 보여주는 강학 자료를 많이 보유하고 있다. 이를 통해 조선시대 서원 교육 이념이 확립, 정착되는 과정 및 서원 교육의 경제적 기반, 교육과정과 교재 및 교육 방법의 변화, 거접, 거재, 통독, 강회, 백일장, 순제 등 다양한 교육 형태, 서원에서의 과거 공부 실태, 유생들의 하루 일과, 참여 인물의 성격 등 조선시대 서원에서 전개된 교육 실제의 변천사를 매우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다.
16~17세기 강학에 대한 자료는 『소수서원등록(紹修書院謄錄)』과 『운원잡록(雲院雜錄)』에서 볼 수 있으며, 『운원잡록』 외 총 10종의 잡록류 기록에는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강학에 대한 간접적인 기록이 나타난다. 18세기 강학 기록으로는 2종의 『거재록(居齋錄)』과 『거재잡록(居齋雜錄)』, 『운원재록(雲院齋錄)』이 있으며, 19세기는 『통독잡록(通讀雜錄)』, 『강소잡록(講所雜錄)』 및 『조선시대영남서원자료』의 「계유정월묘우중수기사(癸酉正月廟宇重修記事)」에 수록된 순제방목, 소수서원 『입원록』 5권[1790~1888]에 수록된 19세기 백일장 방목 등이 있다. 그 외 『죽계지』나 풍기군수와 소수서원 원장 혹은 강장 등을 역임한 주요 인물들의 문집인 『소고집(嘯皐集)』, 『창석집(蒼石集)』, 『단곡집(丹谷集)』, 『식암집(息庵集)』, 『호곡집(壺谷集)』, 『정재집(定齋集)』, 『송서집(松西集)』, 『호고와집(好古窩集)』, 『광뢰집(廣瀨集)』, 『하계집(霞溪集)』, 『대산집(大山集)』, 『오산집(梧山集)』 등에도 소수서원 강학에 대한 기록이 다수 산견된다.
특히 의례 관련 문서로는 주세붕과 이황의 친필 홀기가 현전하고, 석각(石刻)으로는 죽계천의 바위에 주세붕이 ‘백운동’과 경(敬) 자를 새긴 ‘경석(敬石)’이 유명하다. 그 외 『추원록(追遠錄)』, 『육선생유고(六先生遺稿)』, 『가례언해(家禮諺解)』의 목판, 사액을 요청하기 위해 이황이 경상감사 심통원에게 올린 「상심방백서(上沈方伯書)」의 친필본과 명종 임금의 어필로 판각, 사액한 「소수서원」 편액 등이 있다. 영주 소수서원은 2019년 7월 6일 ‘한국의 서원’ 9곳 중 하나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