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1316 |
---|---|
한자 | 驛前時代-全盛期-呼出-榮州近代歷史文化- |
영어공식명칭 | Comeback to the Heyday of Yeokjeon Period, Yeongju Modern Historical and Cultural Street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임경희 |
[정의]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동에서 영주 시민의 근대 생활사를 볼 수 있는 역사문화공간.
[개설]
영주 근대역사문화거리는 영주시 영주동 149-12 외 152필지[두서길·광복로 일원 2만 6377㎡]에 걸쳐져 있는 역사문화 공간으로 영주 시민의 근대 생활사를 보여주는 곳이다. 영주의 구도심인 영주 근대역사문화거리는 영주읍에서 영주시 소재지로 승격하기까지 발전과정을 보여주는 핵심 공간이며, 옛 영주역의 설립·이전과 그 맥락을 함께하고 있다. 따라서 영주 근대역사문화거리에는 철도관사, 이발관, 정미소, 근대 한옥, 교회 등 시민의 근대 생활사를 조명해 볼 수 있는 각종 건축물이 집적되어 있다. 이 때문에 2018년 문화재청의 ‘역사문화자원 기반 도시재생 활성화를 위한 공모사업 시범사업지’로 선정되었고, 근대문화유산의 입체적 보존과 활용 촉진을 위해 문화재청이 새롭게 도입한 ‘선(線)·면(面) 단위 등록문화재’로 최초 등록되었다.
‘선·면 단위 문화재 등록제도’는 기존 점(點) 단위 개별 문화재 관리의 문제점인 정책의 연계성·통합성 결여 및 가치 활용도 제약 등의 한계를 극복하고, 근대문화유산이 도시재생의 핵심자원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하도록 마련된 제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차적으로 ‘영주근대역사문화거리’, ‘군산 근대항만 역사문화공간’, ‘목포 근대역사 문화공간’ 등 3건이 선정되었다.
이에 따라 영주시는 근대 건축물 활용 시점을 해방 이후인 1950~1960년대로 설정해 놓았다. 그리고 영주 지역을 철도 부설에 따른 내륙 소도시의 발전 상황을 보여주는 공간이자, 당시 생활상을 체험하는 공간으로 조성해, 다른 지방자치단체의 근대문화유산 활용과 차별화하려는 계획을 수립하고 있다.
[옛 영주역 앞에 조성된 영주 구(舊)도심의 역사]
1941년 11월 1일 영주-안동 구간 철로가 개통되면서 현재 영주중앙시장 자리 입구에 영주역이 설립되었다. 1942년 4월 1일에는 청량리에서 경주까지 이어지는 중앙선 철로가 영주 지역을 관통하게 됨으로써, 많은 사람이 영주 지역을 찾게 되고, 이로써 이른바 영주 구도심 지역이 형성되었다. 당시 영주 구도심은 영주역 앞에서부터 삼각지[현 분수대]에 이르는 길가[역전통]를 중심으로 조성되었다. 이곳에 관공서·대폿집·식당·다방·여인숙들이 잇달아 들어서면서 번화가를 이루었고, 중앙통의 포목전·옹기전·나무전·어물전 거리와도 이어졌다.
역사(驛舍)와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던 철탄산 자락에는 철도청 직원들을 위한 관사가 들어서, 영주 사람들은 이곳을 ‘관사골’이라고 불렀다. 관사골은 이후 숫골·수용소골·신사골·향교골·사례골 등으로 이어지는 영주 근대 주거지 형성의 시발점이 되었다. 1955년 12월, 6.25전쟁으로 중단되었던 영주-철암 구간 철로가 완공됨으로써, 영주역 주변은 더욱 붐비게 되었다. 그런데 1961년 7월 11일, 이른바 영주 대홍수로 시내를 관통하던 서천(西川)의 제방이 무너져, 시가지가 통째로 수몰되어 버렸다. 영주 대홍수 때문에 집들이 무너져 내리고, 철길이 휘어졌으며, 두 벌 논매기를 끝낸 논밭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대홍수가 영주 전역을 휩쓸고 지나간 며칠 뒤, 영주에 도착한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한절마을 서편 객산(客山)을 잘라 서천을 직선으로 만드는 이른바 직강(直江) 공사를 지시했고, ‘혁명정부’는 수해복구에 달려들었다. 직강 공사에는 육군 제133공병대대와 해병대 제1상륙사단 공병대 등 군인 700여 명이 투입되었으며, 262일 만인 1962년 3월 30일 마무리되었다. 이에 시내를 관통하던 원당천 물길은 남산들[현 영주역] 방향으로 틀어졌다. 서천 물길의 이동은 곧 도시의 중심을 바꾸기 시작하였다. 논밭이 전부였던 남산들 일대에 도로가 뚫리고, 하천부지에는 새로운 시가지가 조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1966년 5월 경북선의 구 노선을 바꾸어 점촌·예천·영주를 직선으로 연결하는 공사를 시작하였다. 경북선은 1966년 11월 9일 영업을 개시했고, 이로써 중앙선과 영동선이 경북선을 통해 경부선과 연결되었다. 이로써 영주 지역은 철도교통의 요충지로 급속히 번성하게 되었다. 1967년 12월 20일 새 영주역이 휴천동에 준공되어, 옛 역사와 함께 업무를 시작하였다. 새로운 시가지에는 영주지방철도청·영주세무서·영주전문학교[현 경북전문대학교] 등이 잇달아 준공되면서, 영주 지역은 1970년대 중반 인구 18만 명에 육박하는 중규모 지방 도시로 성장하게 된다.
그러나 1973년 12월 영주군 영주읍 영주리 역사가 영주읍 휴천리 새 역사로 완전히 이전됨에 따라 옛 영주역 주변은 급속하게 정체되어 갔다.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부터는 인구도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영주역이 빠져나간 영주시 영주동 일대는 차츰 쇠퇴의 길로 접어들면서 구도심으로 전락하였다. 1982년 옛 영주역 자리에 영주중앙시장이 들어서는 등 옛 명성을 되살리려는 노력이 계속되었지만, 쇠락의 속도는 점점 빨라졌고 화려했던 역전시대는 영주중앙시장 입구에 세워진 아래 기념 표지판을 통해서만 어렴풋이 기억될 뿐이었다.
“서기 1941년 7월 1일 중앙선 개통과 함께 개설되었던 본래의 영주역 자리이다. 시가지 확장으로 1973년 12월 23일 휴천동 지금의 자리로 옮기기까지 33년간 교통 대동맥을 이룩한 지역 발전사에 길이 기억되어야 할 곳이다. 1999년 12월 영주시 영주지방철도청”
[두서길, 광복로를 따라 이어지는 근대 역사문화공간들]
2018년 8월 6일 영주 구도심 일대는 국가등록문화재 제720호[영주 근대역사문화거리]로 지정되었다. 두서길과 광복로로 이어지는 길가에 옛 영주역 5호 관사[등록문화재 제720-1호], 옛 영주역 7호 관사[등록문화재 제720-2호], 영주동 근대 한옥[등록문화재 제720-3호], 영광이발관[등록문화재 제720-4호], 풍국정미소[등록문화재 제720-5호], 영주제일교회[등록문화재 제720-6호]와 같은 근대 건축물이 남아있는데, 이것을 통합하여 등록문화재 제720호인 ‘영주 근대역사문화거리’로 지정한 것이다. 이들 근대 역사문화 공간에는 철도 중심지였던 영주의 발전과정과 이 영주 지역 사람들의 근대 생활상이 잘 간직되어 있다.
1935년 건립된 옛 영주역 5호 관사[영주시 두서길 57]와 옛 영주역 7호 관사[영주시 두서길 63]는 일제 관사 주택의 전형을 보여주는 목조 연립주택이다. 일제강점기 영주역에 근무하던 역무원들을 위해 지어졌는데, 옛 영주역 5호 관사는 대지 10,1714.0㎡, 건축면적 117.1㎡, 7호 관사는 대지 904.0㎡, 건축면적 133.5㎡ 규모이며, 철도 집단 관사로 조성된 관사골에 있다. 관사들은 당시 철도국에서 공급한 표준형 주택으로 각각 두 채씩 지어졌으며, 중앙에 담장을 쳐서 분리해 놓았다.
1920년에 지어진 영주동 근대 한옥[영주시 구성로422번길 21]은 조선시대 영주 출신의 명의(名醫) 이석간(李碩幹)의 고택 별채이다. 원래 본채와 2동의 별채가 있었다고 하는데, 본채가 있던 자리에는 현재 4층 규모 안영빌라가 들어서 있다. 가옥의 전체 배치는 ‘品’자형으로 안영빌라 자리에 있던 본채가 중앙에 있었고, 현재 남아있는 이석간 고택은 우측 별채였으며, 그 좌측에 있던 소실된 별채가 있었다고 한다. 개량 한옥인 영주동 근대 한옥은 ‘ㅁ’자형으로 정면 7칸, 측면 6칸의 규모이다.
영광이발관[영주시 광복로 15]은 1930년대 광복로 남쪽 도로변에서 ‘국제이발관’이라는 상호로 개업했다가, 1970년까지 ‘시온이발관’으로 영업해 오던 것을 현 주인이 인수하면서 ‘영광이발관’으로 개칭했다. 8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이발관으로 유명하다.
1920년 준공되어 1935년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풍국정미소[영주시 광복로 23]는 대지 776.0㎡, 연건평 357.5㎡ 규모의 1층 목조건물로 현재는 가동되지 않고 있다. 풍국정미소 건물에는 근대 양곡 가공과 유통의 역사를 보여주는 옛 집기 및 도정 기계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풍국정미소는 2013년 경상북도 산업유산으로도 지정되었다.
영주제일교회[영주시 광복로 37]는 1907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유서 깊은 종교시설이다. 영주제일교회는 1909년 4월 구성공원 아래쪽 초가 3칸에서 시작되었는데, 1950년 6.25전쟁 중 건물이 소실되어 버렸다. 이에 1954년 5월부터 1958년 7월 25일까지 영주제일교회 건물을 새로 건축하였다. 공사 때 영주제일교회 신도들이 직접 참여하기도 했는데, 건축물은 고딕식 건축양식을 차용한 절충 양식으로 건축면적 888.3㎡, 연면적 2470.6㎡ 규모이다. 영주제일교회는 근대 이후 교회가 어떻게 지역 사회와 신도들의 삶에 녹아내리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문화유산이다.
영주시는 이들 근대문화유산을 매입한 후 근현대도시건축전시관, 근대한옥체험관, 근대서비스산업관, 쌀산업문화관 등으로 조성하여 지역의 근대화 과정과 주민의 생활 모습을 다양하게 기록·보전할 계획이다.
[영주로와 번영로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구도심 거리]
‘역전시대의 영주’를 보여주는 근대문화유산은 영주 근대역사문화거리 외에도 영주 시내 영주로와 번영로 곳곳에 흩어져 있다. 그리고 이들 근대문화유산은 옛 역세권에서 번성하다 쇠퇴한 후생시장과 영주중앙시장에서 ‘재생된 도심’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역전(驛前)의 역전(逆轉)’이라고 이름 붙인 영주시 도시재생사업이 거둔 결실들이다.
‘역전의 역전사업’은 2014년부터 2017년까지, 구 역세권인 영주1동과 영주2동 1.5㎢ 지점에 분포하고 있는 후생시장·영주중앙시장·구성마을을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1955년 문을 연 후생시장은 옛 영주역 역세권의 중심 시장이자 전국적 규모 고추시장이었지만, 1973년 영주역 이전으로 쇠퇴를 거듭했고, 2008년 고추시장마저 시 외곽으로 옮겨가면서 시장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1982년 옛 영주역 자리에 문을 연 영주중앙시장은 지역의 철도산업이 위축되면서, 함께 쇠락한 구도심 전통시장 중 한 곳이다. 두 시장 맞은편에 자리한 구성마을은 영주 대홍수로 집과 재산을 잃어버린 수재민들이 모여들면서 형성된 무허가 정착촌이자, 철도노동자의 집단 거주지로 영주시의 대표 낙후지역이었다.
영주시는 2014년 5월 이곳을 ‘도시재생 선도지역’으로 선정한 후 후생시장 권역[근대 역사문화자원의 관광 자원화], 중앙시장 권역[청년창업과 문화예술로 새로운 인프라 구축], 구성공원 권역[공동체 마을기업] 등 3개 권역으로 나누고 이들을 연계해 근대 영주의 모습을 재현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에 따라 후생시장 권역[영주시 번영로173번길 30]에서는 옛날 가게를 활용한 생활문화 놀이터가 조성되고, 고추 가게·양복점·의상실·여인숙 등 근대 시장의 경관과 생활 모습이 되살아났다. 영주 근대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영주근대역사체험관, 게스트하우스 소백여관도 운영하고 있다. 영주중앙시장 전체를 리모델링한 영주중앙시장 권역[영주시 영주로192번길 10]에서는 어울장터·목금토 공방·목금토 문방구·역전 목수 가게 등 청년 세대를 위한 다양한 창작·창업 지원 및 문화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구성마을 권역은 마을 공동체 운동을 통한 주거지 재생 및 ‘노인복지’ 거점 지역으로 조성되었으며, 마을기업인 할매묵공장[영주시 구성로373번길 9-18]과 할배목공소[영주시 중앙로63번길 75]를 운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