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014
한자 宗敎
영어공식명칭 Religion
이칭/별칭 신앙
분야 종교/신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하창환

[정의]

경상북도 영주시에서 이루어지는 신앙 행위의 총칭.

[개설]

영주시는 경북 북부 내륙 지역으로 야외 노지(爐址)나 빗살무늬토기와 같은 신석기시대 유적이 처음으로 발굴된 곳이다. 또한, 고인돌을 비롯해 선돌, 바위그림과 같은 청동기시대 유적 또한 상당수 발굴되었다. 그리고 삼한시대에는 진한 12국 가운데 기저국(己柢國)이 자리하던 곳으로 비정된다. 이런 사실들을 종교적 측면에 대입시켜보면, 부족국가시대 영주에서는 주술사인 샤먼을 통한 토속신앙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을 가능성을 추정할 수 있다.

이후 영주 지역의 종교는 우리나라 일반의 종교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다시 말해서 고대와 중세에는 중국으로부터 전파된 불교와 유교가 차례로 영주에 정착하고, 근·현대에 들어와서는 서양으로부터 전파된 천주교와 개신교가 급속히 교세를 늘려가는 형태이다. 그런데 영주의 종교에서 한 가지 특징은 천주교가 주변 지역들보다 일찍 전파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홍유한(洪有漢)이 스승인 성호 이익의 영향으로 영주시 단산면 구구리에서 천주교의 교리에 따라 생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상황을 보면, 개신교와 불교가 주축을 이루면서도 유교와 천주교가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가운데 1980년대를 전후로 새로운 여러 신종교가 미약하나마 영주의 주민들을 대상으로 종교활동을 펼치고 있다.

[영주의 불교]

영주 지역의 불교 전래 과정을 언급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영주가 신라와 고구려의 접경 지역이고, 원효(元曉)와 의상(義湘)이 고구려의 불교계를 이끌던 보덕(普德)에게 열반경(涅槃經)과 방등경(方等經)을 배운 점을 고려할 때 영주 지역 초기 불교는 고구려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영주 최초 사찰인 영전사(靈田寺)가 669년(문무왕 9) 의상에 의해 건립되었음을 고려할 때 영주 지역의 불교 전래는 통일신라 직전인 7세기 중반에 시작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오면서 소백산 일대를 중심으로 사찰의 건립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676년(문무왕 16)의 부석사(浮石寺), 비로사(毘盧寺), 초암사(草庵寺), 성혈사(聖穴寺), 진월사(陳月寺), 흑석사(黑石寺), 유석사(留石寺), 희방사(喜方寺), 백룡사(白龍寺), 문수사(文殊寺), 안양원(安養院) 등이 건립되었다. 이 사찰 가운데 의상이 창건했다고 알려진 사찰만 8개소인 것을 보면 영주 지역이 화엄불교의 근원지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태조 왕건이 비로사에 여러 번 다녀가고, ‘진공대사(眞空大師)’라는 시호와 ‘보법(普法)’이라는 탑 이름을 하사했다는 기록을 보면, 영주 불교가 왕실의 비호를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의 저명한 고승들인 원융(圓融)·나옹(懶翁)·지눌(智訥) 등이 부석사유석사 등 영주 지역 사찰에서 수도한 것을 보면 영주의 불교는 당시에도 성행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숭유억불정책을 실시한 조선시대에는 영주의 불교 역시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에는 기존 부석사를 비롯해 11~14개 정도의 사찰이 창건과 폐사를 거듭하면서 그나마 사세를 유지한 사찰은 부석사, 성혈사, 초암사 정도였다.

1911년 일제가 「사찰령(寺刹令)」을 공포하면서 일본 불교가 유입되어 전통 불교의 고난이 지속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1949년 소백산전투사령부의 소거령으로 소백산에 있던 백룡사, 영전사, 석륜암 등이 폐사되거나 이전되었으며, 6.25전쟁 때는 비로사·초암사·희방사 등이 전소되거나 일부 소실되면서 귀중한 문화재를 잃기도 하였다. 현재 영주 지역에서는 화엄종찰인 부석사를 비롯하여 100여 개 사찰이 불법을 전파하고 있다. 이들 사찰이 소속된 종단 수는 20여 개가 넘으며, 이 중에서 대한불교조계종이 45개로 가장 많고 그다음이 대한불교법화종, 대한불교태고종, 대한불교천태종 순이다.

[영주의 유교]

영주 지역이 ‘선비의 고을’로 불리는 것은 그만한 근거가 있다. 우리나라 최초로 성리학을 도입한 안향(安珦)과 유교의 나라라고 하는 조선의 건국을 설계한 정도전(鄭道傳)이 바로 영주 출신이기 때문이다. 고려 말과 조선 초기 우리나라 유교를 대표하는 두 인물이 영주 출신이라는 점은 다른 곳보다 이른 시기인 12세기 중반 전후로 설립한 향교가 그 토대가 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런 토대가 걸출한 두 인물인 안향정도전을 배출했듯이, 영주의 유교는 지속해 발전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정도전이 이방원 일파에 의해 살해되고, 뒤이어 세조 때 단종복위운동의 정축지변(丁丑之變)으로 반역의 고을로 낙인찍히면서 비록 황효공(黃孝恭)과 같은 인물이 있었지만, 예상과 전혀 반대로 영주의 유교는 거의 기를 펴지 못했다.

영주에서 다시 유교가 활기를 되찾은 것은 주세붕(周世鵬)이황(李滉)이 풍기군수로 부임하면서부터이다. 주세붕은 1543년(중종 38)에 안향이 어릴 적 글을 읽던 곳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건립하고, 1549년(명종 4)에 부임한 이황은 백운동서원에 사액을 바라는 글을 올려 명종(明宗)으로부터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현판을 하사받았다. 이황은 풍기군수로 재임하면서 소수서원을 중심으로 많은 학자를 길러내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이다. 황준량은 생전에 4개 학교를 세웠는데, 이황이 “금계가 세운 학교에서 수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라고 할 만큼 후학 양성에 힘을 썼다. 박승임은 관직에 있으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고향에서 후학들을 지도하여 그의 문집 『문인록』에는 남몽운을 비롯해 50여 명의 이름이 올랐다.

영주의 유림은 정축지변을 의로운 항거로 규정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금성단[현 영주 금성대군 신단, 사적 제491호]을 설치하고 관련 인물들의 제사를 받드는 한편, 이것을 영주의 선비정신으로 승화시켰다. 이런 영주의 선비정신은 현대에 이르러 유교와 관련된 여러 단체, 즉 성균관유도회 영주지부, 성균관유도회 풍기지부, 성균관유도회 순흥지부, 성균관여성유도회 영주지부, 박약회 영주지회, 담수회 영주지회 등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 이들은 우리나라가 경제성장과 함께 정신적으로 피폐해가는 것을 안타까워하여 선비의 고장인 영주의 정신을 일깨우고, 인성교육과 예절교육으로 올바른 사회를 만들어나가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영주의 천주교]

영주 지역의 천주교는 홍유한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홍유한은 공식적인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지만, 스승인 성호 이익을 통해 『천주실의』·『칠극』·『직방외기』 등을 연구하게 되었다. 이 가운데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와 예수회 신부 판토하의 『칠극』을 더욱 깊이 연구했다. 홍유한은 그 연구로부터 얻은 진리를 몸소 실천하기 위해 1775년(영조 51) 지금의 영주시 단산면 구구리에서 수계 생활을 시작했다. 이는 영주의 천주교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천주교 역사에서도 처음으로 등장한 최초 수계 생활이었다. 홍유한 이후에도 영주에는 미약하나마 천주교가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한 세기가 지난 뒤인 1867년(고종 4)에 풍기 다리골에 살던 신생원이 서울로 잡혀가 순교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후에는 영주에서 천주교는 거의 단절된 것처럼 보인다.

영주에서 천주교의 복음은 1934년 영주군 풍기읍 성내리에서 권대영과 한상호 등이 주일첨례를 보고 풍기공소[현 풍기성당]를 지키면서 다시 전파되었다. 1946년에는 경상남도 거창에 살던 권용덕이 영주군 하망리[현 영주시 하망동]의 자기 집을 영주공소[현 휴천동성당]로 제공하면서 영주의 천주교는 더욱 발전하였다. 이후 1958년에 영주본당[현 휴천동성당] 설립을 시작으로 풍기성당, 하망동성당, 가흥동성당, 부석공소 등이 차례로 건립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영주의 개신교]

대구와 경상도 지역의 개신교는 부산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베어드가 1893년(고종 30) 대구를 방문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1897년 베어드의 처남인 아담스[안의와(安義窩)]에 의해 처음으로 대구에 교회가 설립되고, 1899년 부임한 선교사인 브루엔[부해리(傅海利)], 사이드보담[사보담(史普覃)]에 의해 대구 인근 지역을 중심으로 개신교가 급속히 퍼졌다. 영주에 개신교를 처음 전파한 사람은 아담스이다. 아담스는 1902년 안동 지역을 방문하면서 영주에도 들러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 여파로 영주에 교회가 처음 설립된 것은 1907년 영주군 평은면 지곡리[현 영주시 평은면 지곡리]에 있는 지곡교회이다. 이후 영주 각지에 속속 교회가 건립되었다. 1908년에는 내매교회, 1909년에는 대평교회, 1910년에는 영주제일교회가 설립되었다. 이렇게 교회가 건립되기도 했지만, 일제의 탄압 때문에 폐지되거나 합병되는 예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교회들은 해방 후에 대부분 복구되면서 영주의 개신교는 활기를 띠게 되었다. 6.25전쟁 때 영주중앙교회가 소실되는 피해가 있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 교회 선교사들을 통해 확보한 구제품의 배급이 각 교회와 신도들을 어려움 속에서도 버텨내게 했을 뿐만 아니라, 전후 교회의 성장에 큰 도움을 주었다.

1984년 영주의 개신교는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된다. 1922년부터 안동 지역과 함께 했던 경안노회에서 분리해 영주노회를 구성했기 때문이다. 영주의 개신교는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교육사업을 펼치는 등 국가와 사회의 어려움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을 뿐만 아니라, 강병주 목사나 강신명 목사와 같은 훌륭한 인물을 배출하면서 줄곧 발전하여 현재 140여 개 교회가 복음을 전하고 있다.

[영주의 신종교]

『정감록』의 풍수설에 따르면, 소백산 기슭 오늘날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 일대는 ‘금계포란형의 길지’이며, 피란처로 좋은 곳이라고 한다. 그런 까닭에서 인지 영주에는 다른 지역과 비교해 다양한 신종교가 전파되어 있다. 1960년대에는 성덕도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1970년대에는 통일교, 1980년대에는 대순진리회·대한도덕회·대한천리교·여호와의증인, 1990년대에는 원불교·증산교·한국천부교·한국SGI[국제창가학회] 등이 전파되었다. 이렇게 많은 종파의 신종교가 전파되었음에도 영주 지역에 미치는 영향력은 미미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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