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617 |
---|---|
한자 | 金鎭河 |
영어공식명칭 | Kim Jin-ha |
이칭/별칭 | 치청(穉淸),황암(篁巖)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수환 |
출생 시기/일시 | 1786년 - 김진하 출생 |
---|---|
활동 시기/일시 | 1805년 - 김진하 사마시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841년 - 김진하 정시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850년 - 김진하 사헌부감찰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855년 - 김진하 사간원정언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864년 - 김진하 사헌부장령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865년 - 김진하 병조참판 제수 |
몰년 시기/일시 | 1865년 - 김진하 사망 |
출생지 | 김진하 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 |
거주|이주지 | 김진하 이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가흥동 |
묘소|단소 | 김진하 묘소 - 경상북도 영주시 가흥동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함창(咸昌) |
대표 관직 | 성균관전적|사간원정언|병조참판 |
[정의]
조선 후기 영주 출신의 문신.
[개설]
김진하(金鎭河)[1786~1865]는 성균관전적·사간원정언·병조참판 등을 지낸 문신이다.
[가계]
김진하의 본관은 함창(咸昌), 자는 치청(穉淸), 호는 황암(篁巖)이다. 아버지는 증 이조참판 김기중(金基中), 어머니는 생원 김구련(金龜鍊)의 딸 증 정부인 예안김씨(禮安金氏), 계모는 권사집(權思戢)의 딸 증 정부인 안동권씨(安東權氏), 할아버지는 장사랑 김구환(金龜煥), 증조할아버지는 증 사복시정 김세진(金世𣛎)이다. 부인은 진사 강익(姜榏)의 딸 증 정부인 진주강씨(晉州姜氏), 박재기(朴在璣)의 딸 증 정부인 반남박씨(潘南朴氏), 장임구(張任矩)의 딸 증 정부인 인동장씨(仁同張氏)이다.
[활동 사항]
김진하는 1786년(정조 10) 영천군(榮川郡) 신천리(新川里)[지금의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 일대]에서 출생하였다. 20세가 되던 1805년(순조 5) 사마시에 급제하였지만, 거듭된 집안의 상사로 1819년(순조 19)이 되어서야 성균관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성균관에서 김진하는 학문에 두각을 나타내어 전강에 선발되기도 하였다. 1832년(순조 32) 홍수로 고향의 집이 수몰되자 할아버지 별장이 있던 상현(商峴)[지금의 영주시 가흥동 일대]으로 이주하였으며, 인근에다 쌍죽정(雙竹亭)을 지었다. 김진하는 쌍죽정에서 김기헌(金騏獻)·김기묵(金基黙) 등 지역의 인사들과 교유하였다.
김진하는 1841년(헌종 7) 정시 문과에 급제하였고, 성균관전적·종부시주부·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 등에 올랐다. 당시 이조판서 이광정(李光正)은 자신의 할아버지 이재(李縡)[1680~1746]와 김시빈(金始鑌)[1684~1729]의 인연을 들며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김진하는 인사권을 가진 사람과 만날 수 없다고 말한 뒤 고향으로 돌아왔다.
김진하는 1847년(헌종 13) 사헌부지평, 1850년(철종 1) 사헌부감찰을 거쳐 1855년 다시 사간원정언에 제수되었다. 이때 경상도의 선비들이 장헌세자(莊獻世子)[사도세자(思悼世子)] 탄신 120주년을 맞이하여, 추존을 청원하는 만인소를 올렸다. 양사(兩司)의 대간들이 경상도 선비들을 논핵하자, 김진하는 존호의 추존을 촉구함과 동시에 논핵을 주도한 사헌부대사헌 유장환(兪章煥)[1798~1872]을 탄핵하는 상소문을 준비하였으나, 승정원의 저지로 올리지 못하였다. 이 일로 김진하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무렵 경상도 사림이 청량산 오산당(吾山堂)[지금의 청량정사(淸凉精舍)로 봉화군 명호면 북곡리]에서 강회를 개최하였는데, 김진하가 강장(講長)을 맡았다.
김진하는 1864년(고종 1) 사헌부장령에 제수되었고, 1865년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에 가자되었다. 1865년에는 김진하가 사마시에 급제한 지 회갑이 되던 해로 특별히 가선대부에 가자되었고, 이후 병조참지와 병조참판에 제수되었다.
[묘소]
김진하의 묘소는 영주시 가흥동 상현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