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13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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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榮州-九曲園林-投影-理想鄕 |
영어공식명칭 | Gugogwollim of Yeongju, Utopia of Old Classical Scholars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광우 |
[정의]
경상북도 영주 지역 구곡원림에 얽힌 옛 선비들의 자취.
[개설]
영주시는 선비의 고장이라 자부할 만큼 많은 선비가 배출되었다. 이는 소백산 자락을 바탕으로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어서, 성리학적 은둔을 지향하는 조선시대 선비들에게 이상적인 터전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주의 선비들은 자신의 공간에 구곡원림(九曲園林)을 설정하여 성리학적 이상향을 투영해 나갔다.
지금까지 많이 알려진 영주 지역의 구곡원림으로는 순흥면의 죽계구곡(竹溪九曲), 부석면의 동계구곡(東溪九曲), 문수면 및 평은면의 운포구곡(雲浦九曲)이 있으며, 그 외에도 순흥면의 소백구곡(小白九曲)과 초암구곡(草菴九曲), 문수면의 무도구곡(茂道九曲), 휴천동의 초계구곡(草溪九曲) 등이 전한다. 이 중에서는 구곡원림의 이름만 전해지는 것도 있다. 그리고 문헌으로 전해지지 않는 구곡원림도 있을 것이다. 영주시의 구곡원림 가운데, 많이 알려진 죽계구곡·동계구곡·운포구곡을 통해 옛 선비들이 지향하던 자연관을 느낄 수 있다.
[자연에 구현된 성리학 이념]
성리학이 도입된 고려 후기 이래, 우리나라 선비들은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朱子)[1130~1200]의 논리에 의거해 정치적 대의명분을 세우고, 학문적 가치를 판단하였으며, 생활 방식도 규정하기 시작하였다. 나아가 자연관과 문학관에도 주자의 ‘도(道)’가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선비들은 자신들의 공간을 ‘도’ 위주의 자연관에 의해 명명하였고, 그런 자연관과 문학관을 결부시켜 이른바 구곡원림을 설정하였다.
특히 옛 선비들은 자연에서 자신들의 문화적 가치를 구현하였다. 이들은 자신이 방문한 명승지나 자신의 고향에 으레 ‘8경(八景)’이나 ‘10경(十景)’을 설정하고, ‘8영(八詠)’이나 ‘10영(十詠)’과 같은 제목의 시를 지어 자연을 노래하였는데, 그러한 자연관과 문학관의 백미는 단연 구곡원림의 설정이었다. 구곡원림은 성리학적 이념과 세계관이 반영된 공간으로서 경영자의 사상과 학문적 연원이 반영되어 있다. 더구나 구곡원림은 옛 선비들의 사유 체계 형성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던 주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그 어떠한 공간의 조영 원리보다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주자가 경영한 무이구곡의 현장인 무이산 구곡계(九曲溪)는 지금의 중국 푸젠성[福建省] 난핑시[南平市] 우이산시[武夷山市]에 위치한다. 무이산을 굽어 흐르는 구곡계 인근에는 이국적인 아열대 원시 삼림이 형성되어 있으며 곳곳에 기이한 층암절벽과 폭포가 있기에, 지금도 중국 동남부 최고의 절경으로 손꼽히고 있다. 그래서 무이구곡의 현장은 예로부터 많은 전설의 배경이 되었으며 여러 역사적 고사(古事)가 남겨졌다. 하지만 무엇보다 무이구곡이 주목받는 이유는 주자가 이곳에 정사(精舍)를 지은 후 학문을 연구하고 이곳을 후진 양성 장소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무이산의 구곡계 일대는 후학들에 의하여 주자 성리학이 완성된 이상적인 공간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1183년 주자는 자신의 성리학적 사유 체계를 이곳의 절경에 투영하여 구곡을 경영하였고, 각 굽이마다 성리학적 이상을 담은 시가(詩歌)를 창작하였다. 주자의 자연관과 문학관이, 자신이 제창한 ‘도’의 원리에 의거해 무이구곡시(武夷九曲詩) 이른바 「무이도가(武夷棹歌)」로 재탄생한 것이다. 주자는 한 굽이마다 7언절구의 시로 그곳의 풍경을 하나씩 읊었는데, 이를 계승한 조선의 선비들도 성리학적 ‘도’ 위주의 자연관에 의거해 자신의 공간을 명명하였고, ‘도’ 위주의 문학관을 융합시켜 구곡원림을 설정해 나갔다. 성리학적 소우주가 구현된 구곡원림이 한국적으로 수용·전개되어 갔던 것이다.
[죽계구곡, 죽계천에 깃든 선비의 숨결]
소백산에서 한 가닥 물줄기가 흘러 그 주위로 아름다운 경관을 형성하니, 바로 낙동강의 지류인 죽계천(竹溪川)이다. 일찍이 안축(安軸)[1282~1348]은 이곳의 경관을 좋아하여 「죽계별곡(竹溪別曲)」이라 명명한 경기체가를 짓기도 하였다. 옛 선비들도 이곳의 경관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이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주자의 자연관을 수용하여, 이곳에 구곡원림인 죽계구곡을 설정하였다.
죽계구곡은 지금의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와 배점리 일대이다. 최초 설정자는 명확하지 않은데, 풍기군수로 부임한 후 이곳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소수서원(紹修書院)]을 건립한 주세붕(周世鵬)[1495~1554]이 설정했다는 설도 있고, 역시 풍기군수를 역임했던 이황(李滉)[1501~1570]이 설정했다는 설도 있다. 설정 동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죽계구곡을 유람했던 정범조(丁範祖)[1723~1801]가 남긴 “가을에 들어서니 송문(松門) 깨끗하고, 승려와 함께 하니 구름 위의 새 한가하네, 천천히 돌며 구곡을 구경하니, 무이산 사이에 있는 것 같아라[秋入松門淨僧兼雲鳥閒遲回玩九曲如在武夷閒]”라는 시구를 볼 때, 주자의 무이구곡을 죽계천에 투영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옛 선비들이 설정한 죽계구곡은 어디일까? 단,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은 구곡의 지점은 단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죽계구곡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같은 명승을 대상으로 한 구곡이라 할지라도, 설정자에 따라 각 굽이가 다르게 설정될 수도 있으며, 같은 명칭의 굽이어도 설정 지점과 순서가 다른 경우도 적지 않다. 구곡의 정경을 바라보는 여러 선비의 감정은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죽계구곡 역시 설정자에 따라 지점과 순서에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또 몇몇 지점은 정확히 확인되지 않기에 각 선비가 설정해 놓은 지점을 찾아보는 재미도 있지만, 지점에 얽매이지 않고 각자의 구곡을 만끽하는 것도 소소한 즐거움이 된다.
여기서는 현 영주시 순흥의 읍지인 『재향지(梓鄕誌)』에 따라 죽계구곡을 살펴보기로 한다. 『재향지』에 따르면 제1곡은 취한대(翠寒臺)부터 시작한다. 취한대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 안에 있다. 그리고 인근에는 서원의 정자인 경렴정(景濂亭)이 위치하며, 주세붕이 새겼다는 ‘경(敬)’자 각석(刻石)이 확인된다. 주자의 무이구곡에도 강학 공간이 있듯이, 죽계구곡에도 소수서원과 여러 선비의 자취가 서린 정자가 있어, 구곡원림에 성리학적 이상향이 투영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제2곡은 금성반석(金城盤石)이다. 금성반석의 위치는 명확하지 않지만, 순흥향교 옆에 있는 넓은 바위로 추정되며, 그 유래를 단종복위운동으로 죽임을 당한 금성대군(錦城大君)에서 찾는 견해도 있다. 제3곡은 백자담(栢子潭)이라는 못인데, 상류 지역에 순흥저수지가 축조되면서 현재로서는 원형을 찾아볼 수 없다. 주자는 배를 타고 무이구곡을 거슬러 올랐으며, 그 정경을 시로 남겼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설정된 구곡원림 가운데 실제 주자처럼 배를 띄울 수 있는 곳은 드물다. 이에 선비들은 못처럼 배를 띄울 수 있는 공간을 구곡원림 중 하나로 설정하거나, 배가 정박할 만한 곳을 상징적으로 설정하여 시로써 배의 출입을 묘사하기도 했는데, 백자담도 그런 공간 중 하나일 것이다.
제4곡은 이화동(梨花洞)이다. 이화동은 ‘이점(梨店)’이라고 하는데, 이를 ‘배점(裵店)’으로 보기도 한다. ‘배점’은 이황의 제자이며, 충신으로 정려된 배순(裵純)이라는 사람의 이름에서 연유하는데, 배순의 정신과 자취 때문에 한 굽이로 설정되지 않았을까 추측할 수 있다. 제5곡 목욕담(沐浴潭)도 위치가 명확하지 않다. 죽계천을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넓은 반석에서 물이 떨어져, 하천 사이에 목욕을 할 수 있는 작은 못이 형성된 곳이 있는데, 이곳을 목욕담으로 보기도 한다. 제6곡은 청련동애(靑蓮東崖)로 청련암(靑蓮菴) 동쪽 벼랑이다. 청련암이 어디인지는 알 수는 없으나, 폭포로 인해 한쪽 면이 병풍처럼 깎여 있는 기암이 상류 부분에 있으니, 이 근방 어디일 것이다.
제7곡은 용추폭포(龍湫瀑布)이다. 초암사(草庵寺)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6m 높이의 바위 틈 사이로 물이 쏟아지는데 용이 물을 토하는 형상이다.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폭포만큼 마음을 씻기 좋은 장소는 없을 것이다. 제8곡 금당반석(金堂盤石)은 초암사 위쪽 죽계천에 펼쳐진 넓은 바위로 울창한 숲과 물 사이에서 겸연히 자연에 동화될 만한 공간이다. 영조 연간 순흥도호부사를 지낸 신필하(申弼夏)는 이곳을 죽계구곡의 제1곡으로 설정하였다. 제9곡은 중봉합류(中峯合流)이다. 금당반석에서 100m 정도 거슬러 올라가면 비로봉과 국망봉 쪽에서 내려오는 물이 바로 이곳에서 합류한다. 이 위로는 산속으로 나무가 우거져 있어 접근이 쉽지 않다. 중봉의 울창한 정경은 구곡의 종착점으로는 적당하다. 이곳에서 여러 선비는 마음을 가다듬고, 발걸음을 돌렸을 것이다.
[동계구곡, 구곡원림에서 찾는 도통의식]
1918년 여름, 일련의 선비들이 지금의 영주시 부석면 상석리 도탄마을의 도강서당(道岡書堂)을 찾았다. 도강서당은 개항기 및 일제강점기 때 영주 지역의 선비였던 김동진(金東鎭)[1867~1952]이 문인들을 강학하던 곳이다. 김동진은 선비로서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1919년 이른바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이라 불리는 유림단(儒林團)의 독립청원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독립운동 때문에 여러 차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러한 김동진은 독립운동가이기 전에 성리학을 공부한 선비였다. 이황에서 김흥락(金興洛)[1827~1899]으로 이어지는 성리학 계보, 이른바 퇴계학파(退溪學派)를 계승하였다.
1918년 여름 이곳을 찾은 선비들은 김동진과 김동진의 친우 및 문인들이었다. 여기서 김동진은 주자의 「무이도가」와 이황의 「구대(九臺)」 두 시를 차운(次韻)하였으며, 이어 동계구곡의 굽이마다 시를 지었다. 동계구곡은 동계를 따라 부석면 일대에 분포한 구곡원림으로 김동진이 설정한 것인데, 도탄마을의 이름을 따서 ‘탄계구곡(灘溪九曲)’이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김동진을 비롯한 선비들은 이 자리에서 구곡시를 짓기 전 주자와 이황의 시를 차운하였다. 왜 주자와 이황을 찾았을까? 여기에는 바로 성리학적 도통(道統) 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조선 후기 선비들은 자신들이 계승한 성리학 학통에 도통 의식을 반영시킨 구곡원림을 설정하기도 했다. 이황의 강학 장소였고, 사후 제향처가 되는 안동 도산서원(陶山書院) 일대를 중심으로는 후학과 후손들에 의해 도산구곡(陶山九曲)이 설정되어 있다. 비슷한 명분으로 이언적(李彦迪)[1491~1553]을 제향한 경주 옥산서원(玉山書院) 주위로는 옥산구곡(玉山九曲), 조식(曺植)[1501~1572]의 제향처인 산청 덕천서원(德川書院) 주위로는 덕산구곡(德山九曲)이 각각 후학과 후손들에 의해 설정되었다. 주자의 무이구곡을 계승하여 각자의 구곡원림을 설정함으로써, 주자로부터 이어지는 성리학적 도통 의식의 계승을 표방하였다. 김동진도 마찬가지였다. 주자에서 이황, 이황에서 김동진으로 이어지는 경상북도 북부 지역 퇴계학파 학통에 대한 도통 의식을 동계구곡 설정으로 드러내었다.
동계구곡은 모두 김동진이 소요하며, 학문을 연마했던 곳이다. 김동진은 각 굽이마다 구곡을 설정한 뒤, 돌에 글을 새겨놓아 그 위치를 표시해 놓았는데, 현재 확인되는 각석은 몇 군데밖에 없다. 동계 주위로는 평평하고 기이한 바위가 많아 경관을 감상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먼저 제1곡은 선암대(仙巖臺)이다. 선암대는 부석면 보계리에 있는 선암(仙巖)이라는 바위인데, 주위로는 나무가 우거져 있다. 김동진은 동계구곡의 구곡시인 「동계구곡(東溪九曲)」에서 “1곡(一曲)이라 감호(鑑湖)에서 하선(賀船)을 찾으나, 단지 해오라기만 청천(晴川)에 내림을 보네[一曲鑑湖問賀船 但看鷗鷺下晴川]”라고 선암대를 묘사하였다. 하지만 동계구곡의 제1곡인 선암대는 주자의 무이구곡과 달리 배를 정박할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제1곡에서 거슬러 올라 상석리로 접어들면 제2곡 호산대(湖山臺)가 나타난다. 이곳은 현재 폐교된 부석초등학교 상석분교 맞은편 언덕이다. 원래 연못이 있었지만, 현재는 경지 정리로 흔적만 남아 있다. 제3곡은 회고대(懷古臺)로 우곡리 입구에 있는 바위이다. 이 바위에는 ‘회고대(懷古臺)’라 적힌 각석이 확인된다.
제4곡은 창고대(蒼臯臺)로 부석면 우곡리 우곡교 인근 소나무 아래에 있으며, ‘사곡(四曲)’이라는 각석이 있다. 제5곡은 능운대(凌雲臺)로 부석면 우곡리 우수골마을과 하천 사이에 있는 바위이다. 능운대는 높이 솟은 바위로 동계구곡에서 가장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제6곡 풍영대(風詠臺)는 부석면 우곡리와 소천리 경계에 있는데, 도로 확장 공사로 헐렸고, 건너편 바위에 각석만이 남아 있다. 제7곡 자하대(紫霞臺)는 제6곡에서 200m 떨어진 지점에 있는 자연 암반석으로 바위 위에는 ‘하암동천(霞巖洞天)’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제8곡은 옥간대(玉澗臺)이다. 제7곡에서 550m가량 거슬러 올라가면, 잠수교가 나타나는데 그 옆 언덕에 있는 바위이다. 여기에는 ‘팔곡(八曲)’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마지막 제9곡은 명구대(鳴璆臺)로 소천리 동산 인근에 있으며, 소계(韶溪)와 문천(文川)이 만나는 지점이다. 김동진은 「동계구곡」에서 “세밑에서 학문을 배우는 소년들에게 부끄럽네, 시냇물 소리 귀에 가득하여 앞서가길 재촉한다, 사양자(師襄子)가 바다로 경쇠를 가지고 떠나니, 물 아래서 귀한 가락을 홀로 지킨다[歲暮堪羞學少年磵聲盈耳故催前師襄入海將璆去獨保希音水底懸]”라는 시로 명구대를 감상하였다. 이 시에 등장하는 사양자는 공자에게 거문고를 가르쳤던 악공으로 공자가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주나라의 음악이 사라져가자, 악기를 들고 바다로 떠나간 인물이다.
김동진은 퇴계학파를 계승한 성리학자였다. 하지만 김동진이 살던 시기에는 한 시대를 관통했던 주요 사유체계가 국권 피탈 과정과 맞물려 쇠퇴하고 있었다. 성리학의 정통을 고수했던 김동진에게 이러한 추세는 자괴감을 느끼게 했을 것이고, 후학들에게는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성리학자 김동진이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이유를 마지막 명구대에서 되새겨 볼 수 있다.
[운포구곡, 내성천에 새겨진 그리움]
내성천(乃城川)은 옛 영주 사람들의 자취와 숨결을 느낄 수 있는 하천이며, 예전까지 뛰어난 경관을 자랑하였다. 봉화군 선달산(先達山)에서 발원한 내성천은 영주의 이산면을 거쳐 문수면과 평은면을 지나 낙동강으로 합류한다. 내성천의 가장 큰 특징은 우리나라에서 모래톱이 가장 발달한 하천이라는 것이다. 상류부터 하류까지 아름다운 모래톱이 고르게 펼쳐져 있으며, 또 산이 하천을 여기저기서 막아 물길이 뱀처럼 구불구불 한 사행천(蛇行川)을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운포구곡은 장위항(張緯恒)[1678~1747]이 설정한 구곡원림이다. 장위항의 행장에 따르면 1736년(영조 12) 관직 은퇴 후 고향 와운곡(臥雲谷)으로 내려왔고, 얼마 후 이곳의 경관이 ‘주자구곡’과 비슷하다 하여, 「무이도가」를 차운했다고 하는데, 운포구곡도 이 무렵 설정된 것으로 보인다. 주자의 성리학을 계승한 장위항 역시 자신의 거처를 주자의 무이구곡에 투영시켜, 주자의 사상에 대한 흠모를 드러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운포구곡의 원형은 전혀 찾을 수가 없다. 4대강 사업의 일환으로 지난 2009년 12월부터 영주댐 건설이 진행되었고, 이후 아름다운 모래톱을 자랑했던 내성천의 모습은 자취를 감추었으며, 운포구곡도 대부분 훼손되고 말았다. 이제는 장위항이 설정한 구곡원림으로써, 이 일대의 아름다움을 상상하는 수밖에 없다.
운포구곡의 제1곡은 영주시 평은면 용혈리의 우천(愚川)이다. 여기에는 정칙(鄭侙)[1601~1663]이 세운 우천정(愚川亭)이 있었다. 정칙은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대명의리(大明義理)를 지키기 위해 고향에 은둔했던 인물이다. 장위항은 제1곡을 우천으로 설정함으로써, 선현의 절의정신을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제2곡은 송사(松沙)인데, 이름 그대로 울창한 소나무 숲과 백사장이 조화를 이룬다. 제3곡 용추(龍湫)는 내성천에서 약간 떨어진 시냇물로 행정구역은 안동시 북후면 월전리에 해당한다. 바위틈을 하얗게 흐르는 물의 형세가 용과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제4곡 전담(箭潭)은 제3곡에서 1㎞가량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물살이 화살처럼 빨라 붙여진 이름이지만, 현재 영주댐이 바로 옆에 건설되어 예전의 자취는 찾을 수가 없다. 제5곡은 운포(雲浦)로 평은면 금광리에 위치한다. 제5곡은 무이구곡뿐만 아니라, 다른 구곡원림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구곡원림 경영자 대부분이 제5곡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이와 관련해 제5곡에 서원·서당·정자·재사 등이 많이 건립되었기 때문이다. 장위항도 이곳에 숙야재(夙夜齋)·역락재(亦樂齋)를 건립하여 소요하고 학문을 연마하였다. 장위항은 자신의 시에서 운포를 시내와 산, 숲과 골짜기의 경치가 어우러진 곳이라고 했지만, 이곳 역시 현재는 원형을 찾을 수 없다. 제6곡은 구만(龜灣)이다. 거북이가 많아서, 또는 물굽이 모양이 거북이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역시 백사장과 굽이 흐르는 내성천의 조화를 상상해 볼 수 있으나, 이곳은 이미 근대에 철도 개통과 토석 채취로 많이 훼손되었으며, 현재는 댐 건설로 수몰된 지역이다.
제7곡 금탄(錦灘)은 제6곡에서 2.5㎞가량 떨어진 곳으로 평은면 강동리에 해당한다. 이름 그대로 비단 같은 여울을 상상해 볼 수 있다. 한때 이곳은 천연기념물 제200호 먹황새가 겨울을 지내던 곳이었다. 제8곡 동저(東渚)는 제7곡에서 2㎞ 떨어진 곳으로 지금은 수몰된 동호마을이 옆에 위치했었다. 한 폭의 그림처럼 모래톱이 펼쳐졌으며, 백로 서식처로 유명했었다. 마지막 제9곡은 지포(芝浦)이다. 내성천이 경관을 이루고 접근하기가 쉬워, 얼마 전까지 이곳에는 평은유원지가 있었다. 모래섬이 형성되어 있고 물이 잔잔하기 흐르는 지포 가까이에는 깊으실[深谷]이라는 마을이 있다. 이름 그대로 영지버섯을 캐며 유유자적한 삶을 살만하고, 인적 드문 곳으로 구곡의 마지막으로 설정하기에는 적당한 곳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는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