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352
한자 三一運動
영어공식명칭 March 1st Movement(Korea's Independence Movement)
이칭/별칭 3.1독립운동,3.1만세시위운동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영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3월 21일 - 3.1운동 영주면 만세시위운동 시작
전개 시기/일시 1919년 3월 21일 - 3.1운동 영주면 만세시위운동 전개
종결 시기/일시 1919년 3월 21일 - 3.1운동 영주면 만세시위운동 종결
발단 시기/일시 1919년 4월 3일 - 3.1운동 풍기면 만세시위운동 계획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4월 9일 - 3.1운동 풍기면 만세시위운동 시작
전개 시기/일시 1919년 4월 9일 - 3.1운동 풍기면 만세시위운동 전개
종결 시기/일시 1919년 4월 9일 - 3.1운동 풍기면 만세시위운동 종결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4월 11일 - 3.1운동 장수면 만세시위운동 시작
전개 시기/일시 1919년 4월 11일 - 3.1운동 장수면 만세시위운동 전개
종결 시기/일시 1919년 4월 11일 - 3.1운동 장수면 만세시위운동 종결
발생|시작 장소 장수면 만세시위운동 시작 장소 - 경상북도 영주시 장수면 호문리 지도보기
발생|시작 장소 풍기면 만세시위운동 시작 장소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지도보기
발생|시작 장소 영주면 만세시위운동 시작 장소 -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동 지도보기
종결 장소 장수면 만세시위운동 종결 장소 - 경상북도 영주시 장수면 호문리 지도보기
종결 장소 풍기면 만세시위운동 종결 장소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지도보기
종결 장소 영주면 만세시위운동 종결 장소 -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동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
관련 인물/단체 박인서|오하근|권태중[영주면 만세시위운동]//안용호|최성원|남영진|이화백|김용준|남상필|황정흠(黃鼎欽)|황정흠(黃政欽)[풍기면 만세시위운동]//손달익|장윤덕|송득용|손용백|황학명[장수면 만세시위운동]

[정의]

1919년 3월 21일부터 1919년 4월 11일까지 경상북도 영주 지역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운동.

[개설]

1919년 서울에서 비롯된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무렵 영주 지역에서도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영주 지역의 만세시위운동은 1919년 3월 21일 영주면 만세시위운동을 시작으로 1919년 4월 9일 풍기면 만세시위운동, 1919년 4월 11일 장수면 만세시위운동으로 이어졌다.

[역사적 배경]

영주 지역의 만세시위운동은 파리강화회의의 민족자결주의 사조나 일본 도쿄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과 같은 대외적 요인은 물론 고종황제의 인산과 같은 대내적 요인과도 직접적인 관련 없이, 서울에서 비롯된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고, 인근 지역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일어났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영주 지역 주민들이 당면한 현실 문제, 곧 일제 식민통치에 대한 불만과 극복이라는 민족 문제와 영주민들이 처한 과중한 조세 부담이라는 일제의 경제적 수탈 문제 등이 직접적인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경과]

영주 지역 3.1운동은 3회에 걸쳐 일어났다. 가장 먼저 일어난 것은 1919년 3월 21일 영주면 만세시위운동이다. 봉화군 상운면에 사는 박인서(朴仁緖)는 전국 각지에서 3.1운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영주군 이산면에 사는 오하근(吳夏根)과 상의하여 1919년 3월 21일 영주군 영주면 영주장날에 만세시위운동을 일으키기로 의견을 모았다. 오하근은 영주군 영주면 영주리에 사는 권태중(權泰中)에게도 부탁하였다. 권태중은 태극기를 15매 만들어 만세시위운동을 준비하였다. 마침내 1919년 3월 21일 박인서·오하근·권태중은 영주장터로 가서 장꾼들에게 준비한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만세운동의 참여를 촉구하였다. 1919년 3월 21일 오후 5시 무렵 박인서·오하근·권태중은 군중과 함께 쌀시장과 어물시장을 중심으로 태극기를 휘두르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행진을 하려고 할 때 순찰 중이던 헌병들이 달려왔다. 박인서·오하근·권태중은 그 자리에서 붙잡히고 군중이 해산당하면서 영주면 만세시위운동은 끝났다.

영주면 만세시위운동이 끝나고 얼마 후 1919년 4월 9일 풍기장날 풍기장터에서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이날 만세운동은 영주군 봉현면 대촌동[현 영주시 봉현면 대촌리]에 사는 농민 안용호(安容鎬)·남영진(南永鎭)·최성원(崔盛源) 등이 계획하고 주도하였다. 안용호는 평소 과중한 세금과 일제의 경제적 침탈에 대한 불만이 누적되면서 독립에 대한 의지를 키워오던 중, 전국 각지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자신도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하고, 같은 마을인 봉현면 대촌동의 최성원의 집을 찾아갔다. 마침 최성원의 옆집에 사는 남영진도 와 있었다. 안용호·남영진·최성원은 1919년 4월 9일 풍기면 풍기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약속하였다. 안용호·남영진·최성원은 태극기 제작 등 만세시위운동을 준비하였다. 1919년 4월 9일이 되자 안용호·남영진·최성원은 준비한 태극기를 가지고 장터로 갔다. 1919년 4월 9일 오후 3시 무렵 군중이 많이 모인 쌀시장을 중심으로 태극기를 휘두르며 만세시위운동을 펼쳤다. 안용호 등은 모여든 군중을 주도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하던 중, 일본 헌병과 수비병들에게 체포되고 군중은 해산되었다. 그러나 시위 행렬에 참여했던 황정흠(黃鼎欽)·김용준(金容俊) 등이 시위를 계속 주도함으로써 만세운동은 지속되었다. 철수했던 일본 헌병들이 다시 출동하여 주도자들이 붙잡히고 군중은 해산되면서 풍기면 만세시위운동도 종결되었다.

풍기면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난 이틀 뒤 1919년 4월 11일 장수면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영주군 장수면 호문리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운동은 호문리 마을 서당에서 공부하는 손달익(孫達翼)이 각지 만세운동 소식을 듣고, 서당에서 함께 공부하는 장윤덕(張潤德)·송득용(宋得龍) 등에게 권유하여 마음을 모았다. 손달익 등은 1919년 4월 11일 호문리 마을 앞 웅곡산에서 만세시위운동을 펼치기로 하였다. 1919년 4월 11일이 되자 손달익·장윤덕·송득용 등은 웅덕산으로 올라가 손달익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힘껏 외쳤다. 이렇게 만세시위운동을 벌이던 중 순찰하던 일본 헌병과 헌병보조원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이처럼 1919년 4월 11일 장수면 만세시위운동을 끝으로 영주 지역 3.1운동은 종결되었다.

[결과]

영주면 만세시위운동의 주도자들은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권태중 태 90도, 오하근 징역 1년 6월, 박인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풍기면 만세시위운동 주도자들은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태 90에서 징역 1년 6월의 고초와 옥고를 겪었다. 장수면 만세시위운동을 일으켰던 청년들 역시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징역 6월 내지, 1년에서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고초를 겪었다.

[의의와 평가]

영주 지역 3.1운동영주면·풍기면·장수면 3개 지역에서 일어났다. 1919년 3월 21일 영주 지역 3.1운동은 서울과 각지에서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 외에는 다른 어떤 영향도 거의 받지 않은 상황에서 자체적으로 일어났다는 특징이 있다. 특히 영주 지역에서 가정 먼저 일어난 영주면 만세시위운동은 이웃 지역의 만세시위운동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 또 영주면 만세시위운동의 주도자인 박인서는 일제 식민통치에 대한 불만과 민족의 독립에 대한 희망 속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1919년 4월 9일 풍기면 만세시위운동은 영주군 장수면 대촌동 농민들이 주도하였다는 점, 일제의 경제적 침탈과 과중한 조세 부담에 대한 불만이 만세시위운동으로 이어졌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처럼 풍기면 만세시위운동은 일제의 경제적 침략에 대한 일반 대중의 저항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끝으로 장수면 만세시위운동은 마을 서당에서 공부하는 청년들이 조국 독립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갖고 혈서까지 써 가며 만세시위운동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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