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1325
한자 多樣-痕迹-榮州-傳統-
영어공식명칭 A Story about Traditional Village of Yeongju that Have Many Traces of Life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인균

[정의]

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의 전통마을인 무섬마을 이야기.

[개설]

영주 지역의 전통마을인 무섬마을은 행정구역상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에 있으며, 영주 시내에서 자동차로 30분 정도 거리에 있다. 현재 무섬마을의 진입로는 서쪽에 위치한 수도교와 동남쪽의 육로가 존재하나, 과거의 무섬마을 진입로는 외나무다리가 유일하였다. 그로 인해 무섬마을의 이름은 ‘물섬’에서 변화된 ‘무섬’이라 지어졌다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무섬마을반남박씨선성김씨 두 성씨의 집성촌이며, 기존의 전통가옥과 기록을 통해 복원한 가옥들로 구성되어 영주 지역 전통마을로서 이름나있다.

[무섬마을의 역사]

영주 무섬마을은 조선시대 영천군 진혈면에 속했는데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 영주군 평은면에 속하여 해방 후까지 계속되다가 마을 앞 다리가 완성된 후인 1983년 2월 15일에 영풍군 문수면으로 편입되었다. 한국전쟁 전에는 120여 가구에 500여 명이 살고 있던 마을이었으나 현재는 40가구에 45명만이 살아가고 있다.

무섬마을의 개척은 17세기 전반 반남박씨 입향조인 박수(朴檖)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박수는 마을 서편의 머럼에서 들어와 나무숲을 치고 집을 지어 기반을 닦았다고 전해진다. 1남 1녀 중 아들 박창반이 선성김씨 문중 김윤일의 딸과 혼인하였고, 딸 또한 선성김씨 김범석에게 출가하여 반남박씨선성김씨무섬마을에 집성촌을 형성하였다. 박수는 현재의 종가댁인 만죽재에 자리를 잡았으며, 선성김씨의 김대가 자리 잡은 곳은 김제은 가옥이었으나 김수영 가옥으로 이사를 하였다고 한다. 병호시비(屛虎是非)[영남 지역 유림들이 병파와 호파로 나뉘어 전개된 분쟁]가 일어났을 때, 무섬마을선성김씨 문중은 안동 하회의 풍산류씨, 가일의 안동권씨, 오미·오록의 풍산김씨 등과 함께 병론에 가담하였다.

[외나무다리와 무섬마을 주민의 삶]

영주 무섬마을은 현재의 수도교와 마을 뒤편의 육로가 건설되기 전에는 외나무다리를 통해 세상 밖과 교류할 수 있었다. 마을 주민들은 외나무다리에 대하여 “외나무다리로 꽃가마 타고 시집왔다 죽으면 그 다리로 상여가 나갔다.”라고 전할 정도로 애착과 중요성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현재 무섬외나무다리축제가 매년 행해지고 있는데, 축제의 행사 중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특징은 꽃가마 행렬이 외나무다리를 통해 무섬마을로 들어와 혼례를 치르고, 생이 끝나 장례 행렬이 외나무다리를 통해 마을 밖으로 나가는 모습의 혼례와 상례가 과거의 모습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무섬마을에서 태어나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및 동지춘추판사를 지낸 반남박씨박제연무섬마을에 대하여 나의 조용한 삶이라는 시를 지었다. 시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오헌유거(吾軒幽居)[나의 조용한 삶]

섬계일곡류 위아복거유(剡溪一曲流爲我卜居幽)[평온한 시냇가 한 구비 물가에다 조용한 나의 살 곳 정했도다]

초창면황독 사명온백구(草漲眠黃犢沙明穩白鷗)[초원 모래톱엔 송아지 잠들고 밝은 모래밭엔 해오라기가 평온하네]

산광당호영 수세요함부(山光當戶暎水勢繞檻浮)[산 빛은 마땅히 나의 집 비추고 물 굽이 감기는 곳 난간이 떠 있는 듯]

미파어초화 어언월상루(未罷漁樵話於焉月上樓)[어부와 나무꾼의 이야기도 끝나기 전 어느새 둥근 달 누각 위에 떠있네]

[민족운동의 중심지 무섬마을]

영주 무섬마을선성김씨 문중은 병론에 가담하였는데, 흥선대원군과 친분을 쌓았다고 전해진다. 병론은 대체로 의병운동계몽운동에 소극적이었는데, 의병운동 시기에는 자금 지원이 주를 이루었으며, 계몽운동이 활발한 시기에는 동참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선성김씨 문중은 1920년대 사회주의를 수용함으로써 민족운동에 가담하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해우당 김낙풍의 증손인 김화진반남박씨 문중의 박찬하 등이 있다.

영주 무섬마을의 사회운동은 영주청년동맹을 중심으로 영주농민조합, 신간회 영주지회 등에서 사회운동을 펼쳤는데, 대부분의 활동은 청년동맹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졌다. 1928년 후반 무섬마을 청년들은 영주 지역의 각종 단체에서 핵심 간부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김화진신간회 영주지회의 대표회원, 상무집행위원을 맡았으며 영주농민조합의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김성규신간회 영주지회의 서무부장에, 김계진신간회 영주지회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점차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김성규의 국제무산청년데이 기념 통지문 살포 시도와 김화진의 순흥청년회 해체 시도, 한해 구제활동, 김계진의 영주 2차 격문 의거 등이 있다.

교육운동 또한 활발하였다. 무섬마을에는 아도서당이라는 기존의 교육 장소가 있었으나, 아도서숙을 짓고는 문맹 퇴치와 민족 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민족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던 운영위원을 중심으로 교육이 이루어졌으며, 이들에 의해 후학이 길러졌으나 1930년대 적색농민조합사건에 의해 운영위원들이 구속되어 결국 폐쇄되었다. 이후, 영주 지역의 민족운동은 비밀단체를 통해 전개되기 시작하는데, 일제에 의해 번번이 실패하여 결국 숨죽여 지내다가 광복 이후 무섬마을로 돌아오게 되었다.

무섬마을의 민족운동은 대체로 상위계층 또는 주요 인물에 의해 전개되었다. 그러다 보니 운영위원들의 구속 또는 탄압으로 인해 민족운동은 확장될 수 없었고 한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안동 또는 다른 지역과의 연계를 계획하였으나 이 또한 번번이 실패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몇몇 주요 인물에 의해 교육운동, 민족운동, 적색농민조합 등이 이루어지다 보니 일제의 약한 탄압에도 기반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모습은 서울, 경기권과 반대의 명문가 출신에 의한 민족운동이었으며, 경북 지역의 민족운동 한계라 할 수 있다.

[치맛자락으로 불길을 막은 효부 권씨 할머니]

영주 무섬마을에는 「치맛자락을 펼쳐 화마를 막은 권씨 할머니의 보은」에 관한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오고 있다. 권씨 할머니가 시집온 가문은 무섬마을의 입향조인 치류정 김대의 가문으로 부군은 세 번째 자손의 아들인 김낙수였다. 김낙수가 15세가 되던 해에 혼사가 오고 갔으며, 권씨 할머니의 집안과 결혼을 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권씨 할머니가 간질병 환자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파혼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를 이루자 김낙수는 “혼사의 결정은 가문 간의 약속인데 어떻게 깰 수 있으며, 파혼당한 이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일을 할 수가 없다.”라며 혼사를 진행하였다고 한다. 이후 권씨 할머니는 김대의 가문으로 시집을 왔고, 김낙수는 권씨 할머니의 간질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노력을 다하였으나 결국 1년 6개월 이후 유명을 달리하였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1877년(고종 14) 무섬마을에 큰 화재가 일어났는데 김낙수의 집만 불이 타지 않아 마을 사람들은 궁금해하였다. 몇몇 동네 사람들이 김낙수의 집 지붕 위에서 녹의홍상을 입은 젊은 아낙네가 치맛자락을 펼쳐 불길을 막는 것을 보았다고 하며, 그 아낙네가 권씨 할머니일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은 권씨 할머니가 김낙수의 덕에 보답하고자 불길을 막았다는 이야기를 후대까지 전하였다.

[무섬마을의 문화재]

영주 무섬마을의 문화재로는 해우당 고택[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92호], 만죽재 고택[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93호], 영주 수도리 김덕진 가옥[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17호], 영주 수도리 김뢰진 가옥[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18호], 영주 수도리 김위진 가옥[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60호], 영주 수도리 김규진 가옥[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61호], 영주 수도리 김정규 가옥[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62호], 영주 수도리 박덕우 가옥[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63호], 영주 수도리 박천립 가옥[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64호] 등이 있다.

무섬마을은 마을 서쪽 앞을 내성천이 지나고 마을 동편으로는 태백산의 줄기인 학가산에 안겨있는 형상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장소적 특성으로 인해 길지로 취급받았고 무섬마을의 주택들은 대체로 방향에 구애받지 않고 강을 바라보고 지어졌다. 이러한 무섬마을의 자연적 길지를 최대한 지키려고 노력한 주민들의 인내로 인해 현재까지 무섬마을은 시대적 변화에 순응하여 전통마을로서 입지를 공고히 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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