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006
한자 歷史
영어공식명칭 History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집필자 이수환

[정의]

선사시대부터 현재까지 영주 지역의 역사.

[개설]

소백산 아래 교통의 요충지였던 영주는 고대부터 삼국의 쟁탈지가 되었으며, 통일신라시대에는 부석사(浮石寺)가 창건되어 우리나라 불교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성리학을 도입한 안향(安珦)이 배출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이 설립되는 등 유교문화를 꽃피워 나갔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기존 영천·순흥·풍기 지역이 통합되어 지금의 영주가 탄생하였으며,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으로 대표되는 민족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선사]

영주 지역에서는 구석기 유적이 발견되지 않았으며, 신석기 유적만 몇 군데 보고되었다. 특히 영주 대촌리 유적은 경북 북부 내륙 지역에서는 처음 발굴 조사된 신석기시대 유적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청동기시대 유적은 생활·무덤·바위그림 등의 유적이 조사·보고되었다. 집자리 2동이 확인된 가흥동 유적의 경우 경북 북부 지역에서 조사된 청동기시대 유적 가운데 가장 빠른 시기에 속하는 집자리 유적으로써, 남한강을 수로로 활용한 교류관계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무덤 유적으로는 교촌리 지석묘, 휴천리 지석 및 입석, 반구리·사계리·석포리·용산리·휴천동 지석묘군 등의 고인돌이 보고되어 청동기시대 영주 지역 사람들의 생활상과 세력 형성을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48호로 지정된 영주 가흥리 암각화는 방패 모양 또는 석검 손잡이, 신의 얼굴 등으로 불리는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이는 경주 석장동, 고령 장기리, 포항 칠포리 암각화 등 경북 지역에서 확인되는 바위그림과 같은 계통에 속한다.

[고대]

삼국시대 영주 지역은 소백산맥을 경계로 이북과 이남 지역을 연결하는 요충지였기에 일찍이 삼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발전해 왔다. 이는 내이군(奈已郡)·급벌산군(及伐山郡)·기목진(基木鎭) 등의 행정구역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재위 80~112]이 백제로부터 내이군을 취했다고 하며, 158년 아달라이사금이 죽령을 개통했다고 한다. 그러나 2세기 무렵 신라의 영역이 실제 소백산맥 일대까지 진출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기에 후대 요충지라는 인식이 1~2세기에 내이군을 두고 백제와 신라의 격전지로 전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내이군은 매곡현(買谷縣)과 고사마현(古斯馬縣)을 영현(領縣)으로 두고 있었다. 급벌산군은 고구려 우수주(牛首州) 소속이었으며, 지금의 영주시 부석면 일대로 비정되는 이벌지현(伊伐支縣)을 영현으로 두고 있었다. 순흥 읍내리 벽화고분어숙묘(於宿墓) 등의 고구려 계통 유적은 5세기 이후, 한동안 이 지역이 고구려의 영향 아래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기목진의 설치 연혁은 불명확한데, 신라가 고구려 남하를 막기 위해 지금의 영주시 풍기읍 일대에 설치한 군진(軍鎭)으로 보인다. 이처럼 영주 지역은 삼국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지역이었으나, 5세기 이후에는 완전히 신라 영역으로 편입된다.

신라는 삼국통일 후 전국을 9주 5소경 체제로 재편하였는데, 영주 지역은 옛 고구려 영토에 해당되는 삭주에 편제되었다. 757년(경덕왕 16) 이루어진 행정구역 개편 때, 내이군내령군(奈靈郡), 영현인 매곡현과 고사마현은 선곡현(善谷縣)과 옥마현(玉馬縣), 급벌산군급산군(岋山郡), 영현인 이벌지현은 인풍현(隣豊縣)으로 각각 개칭되었다. 통일신라시대 주목할 점은 영주 지역이 한국 불교문화의 한 축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7세기 후반 의상부석사를 창건하고 화엄사상 중심의 새로운 불교를 구상하였는데, 이후 부석사는 전국에 산재한 화엄십찰(華嚴十刹)의 첫 번째 도량으로서 불교계의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된다.

후삼국시대 영주 지역은 후고구려 및 고려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이 무렵 주목되는 인물은 지기주제군사(知基州諸軍事) 강공훤(康公萱)으로, 왕건 휘하에서 참모와 대장군으로 출정하여 고려가 후백제의 항복을 받아내는데 많은 공을 세웠다.

[고려시대]

고려시대 영주 지역의 행정구역 변천은 조선시대의 영천(榮川)·풍기·순흥 지역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영천 지역은 신라 때 내령군이었는데, 고려 초기 강주(剛州)로 개칭되었다. 강주에는 995년(성종 14) 지방 세력에 대한 통제력 강화와 국방력 강화를 위해 도단련사(都團練使)가 파견되었다. 그러나 도단련사는 1005년(목종 8)에 폐지되고, 강주는 1018년(현종 9) 길주(吉州)의 속현이 되었다. 12세기 이후 정부는 지방관 파견을 확장하게 되고, 이에 1143년(인종 21) 강주순안현(順安縣)으로 개칭되었으며, 비로소 현령이 파견되기 시작하였다. 1259년(고종 46)에는 위사공신(衛社功臣) 김준(金俊)[김인준(金仁俊)]의 고향이라 하여 영주(榮州)로 승격되었고, 지영주사(知榮州事)가 파견되었다.

풍기 지역에 해당하는 기목진은 고려 초기 기주(基州)로 개칭되었다. 1018년 주·속현체제로 재편될 때 길주의 속현이 되었다가, 1172년(명종 2)에 감무가 파견되면서 독립하였다. 그 뒤 안동부에 내속되었다가, 1390년(공양왕 2)에 다시 독립하였으며, 은풍현(殷豊縣)을 속현으로 삼았다. 순흥 지역의 급산군은 고려 초기 흥주(興州)로 개칭되었다. 기주와 함께 1018년 길주의 속현이 되었다가 1172년 감무가 파견되었다. 특히 흥주는 원나라 간섭기인 충렬왕·충숙왕·충목왕 때 왕의 태(胎)가 안치된 곳이라 하여 읍격이 여러 차례 변하였다. 1274년에는 흥녕현(興寧縣)으로 개칭되고 영(令)이 파견되었으며, 1313년에는 명칭이 흥주로 환원된 후 지흥주사(知興州事)를 파견하기 시작하였다. 또 1348년(충목왕 4)에는 순흥부(順興府)로 승격되었다.

고려시대 영주 지역의 문화는 안향부석사의 존재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순흥 출신 안향은 원나라에서 성리학을 도입하여, 우리나라 성리학에 크게 이바지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안향순흥안씨 가문은 명문가로 성장하게 되고, 고려 말 안축(安軸)·안보(安輔) 등의 학자와 관료를 배출하였다. 한편 고려는 사격(寺格)에 따라 주지의 격을 달리했는데, 부석사는 고려시대 동안 교종 계통의 최고 승계인 수좌(首座), 즉 불교계의 비중 있는 인물들이 임명되었다. 이에 힘입어 무량수전(無量壽殿) 등 불당들이 중창될 수 있었고, 여러 고승이 주석하였다.

[조선시대]

1413년(태종 13) 전국적인 행정구역 개편 당시 순흥부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종3품 도호부사 파견], 영주는 영천군(榮川郡)[종4품 군수 파견], 기주기천현(基川縣)[종6품 현감 파견]으로 각각 개편되었다. 이중 기천현은풍현을 속현으로 두었는데, 1450년(문종 즉위년) 은풍현에 문종의 태(胎)가 묻혔다 하여, 풍기군(豊基郡)으로 승격되었다. 1457년(세조 3) 순흥도호부에 유배되어 있던 금성대군(錦城大君)이 지역 사족들과 단종복위운동을 도모하게 되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가고 순흥도호부는 역향(逆鄕)으로 몰려 혁파되었다. 이때 순흥도호부 영역은 이웃한 영천군·풍기군·봉화군에 분속되었다. 1681년(숙종 7) 단종 신원을 계기로 1683년(숙종 9) 순흥도호부는 복설되고, 분속당한 옛 영역은 환원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순흥도호부의 토성(土姓)으로는 안·이·신(申)·윤, 영천군은 민·우·예(艾)·팽·동(董), 기천현은 정(鄭)·안·피(皮)·방(邦)·음(陰)·진(秦)·신(辛), 은풍현은 오·박·김·신(申)이 확인된다. 이 가운데 순흥의 토성 순흥안씨는 호장직을 세습하다 고려 후기 신진사대부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토성 세력의 성장은 조선 초기 타관 명문가의 이주를 촉진했다. 연안김씨(延安金氏) 가문과 평해황씨(平海黃氏) 가문의 조선 초기 영주 이주도 이러한 배경에서 비롯되었다.

영주는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도입한 안향의 고향이었다. 이에 1543년(중종 38)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안향을 제향하기 위해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자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을 건립하였다. 한편, 이황(李滉)은 처향(妻鄕)이었던 영주를 자주 왕래하며 16세기 영주 지역의 성리학 발달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에 1558년(명종 13) 이산서원(伊山書院) 건립에 간여하였고, 건립 이후에도 원규(院規)를 직접 제정하는 등 많은 관심을 보여주었다. 또 이황의 문하에서 황준량(黃俊良)·박승임(朴承任) 등 영주 지역을 대표하는 성리학자가 배출되기도 하였다.

[개항기]

1895년 근대적 행정구역 개편이 이루어지면서 영천군·순흥도호부·풍기군은 경상북도 관할의 영천군·순흥군·풍기군으로 편제되었다. 하지만 열강의 침탈 속에 일제의 식민지화가 노골화되자 영주 지역 사람들은 의병전쟁을 전개하게 된다. 이에 을미의병 시기인 1896년에는 영천의진·풍기의진·순흥의진이 조직되어 일제와 맞섰고, 1905년 을사의병 시기에는 다른 지역의 의병들이 영주 지역으로 들어와 영주의 의병과 함께 활동하였다. 1907년 정미의병기에도 소백산과 태백산을 거점으로 의병들의 항전은 지속되었다. 한편, 애국계몽운동의 하나로 1900년대에는 영주 지역에 소흥학교·안정학교·강명학교·조양학교·내명학교 등 신식교육기관이 설립되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

1914년 일제는 원활한 식민통치를 위해 행정구역 개편은 단행하였다. 이에 기존 영천군·순흥군·풍기군영주군(榮州郡)으로 통합되면서 13개 면으로 편제되었다. 또한, 조선인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1910년대에는 영주 지역에 영주헌병분대를 설치하였다. 1919년 하반기 보통경찰제도로 개편한 후에는 영주경찰서와 그 예하에 주재소를 설치하여 조선인들의 민족운동을 감시해 나갔다.

개항기 의병전쟁을 계승하여 영주 지역에서는 일제강점기 동안 치열한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이에 1910년대 전반기에는 대한광복단과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 등이 조직되어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펼쳤으며, 1919년 3.1운동 때에는 영주면·풍기면·장수면에서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다.

1920년대에는 청년운동·농민운동·항일민족협동전선운동이 영주 지역에서 전개되었다. 이 무렵 청년운동 단체로는 영주청년회·풍기기독청년회·풍기청년회·철우단(鐵友團)·영주청년동맹이 주목된다. 또 농민운동 단체로는 조선노동공제회 영주지회·풍기소작조합·영주농민조합이 결성되어 일제의 수탈에 저항해 나갔다. 항일민족협동전선운동으로는 1927년 11월 결성된 신간회 영주지회와 1929년 4월 결성된 근우회 영주지회의 활동이 대표적이다. 1930년대 이후 전시체제하에서는 영주군공산주의자협의회·적농재건투쟁위원회·영주적색노동조합건설위원회 등이 결성되어 사회주의적 경향의 농민운동이 전개되었다.

[현대]

6.25전쟁 당시 영주 지역에서는 풍기영주지구 전투남대리지구 전투가 벌어지는 등 치열한 전쟁터가 되기도 하였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는 경북 북부 지역 철도 교통의 중심으로서 발전해 나갔다. 그런 가운데 1961년 7월에 있었던 영주 대홍수로 큰 수해를 입게 되고, 복구 과정에서 물길이 변경되어 현재 시가지 모습이 형성되었다. 1980년에는 인구 증가로 영주읍이 영주시로 승격되었으며, 나머지 농촌 지역은 영풍군(榮豊郡)으로 분리되었다. 하지만 생활권의 변화로 인한 많은 불편이 발생하여, 1995년 1월 1일 다시 통합이 이루어져 현재의 영주시가 탄생하게 된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0.06.19 내용 수정 내기군(奈己郡) ->내이군(奈已郡)
이용자 의견
배** 영주의 고대 명칭은 서라벌의 날이군(捺已郡)에서 유래한 바 그 후 명칭은 내기군(奈己郡)이 아니라 내이군(奈已郡)이 마땅할 것입니다. <동국여지승람> 등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확인해 주세요.
  • 답변
  • 디지털영주문화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청한 내용에 대하여 확인 후 수정하였습니다. 의견 개진에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2020.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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